네 번의 순례길과 다시 떠나는 다섯 번째
“ 나, 가을에 산티아고 순례길 갔다 올래.”
“ 응? 거기가 어딘데? 갑자기 순례길? 이상한 종교에 가입했어? ”
남편의 반응은 예상한 대로다.
의논이라기보다 남편에게 통보했다. 나는 떠나고 싶었다.
더 이상 버티고 있을 수 없을 만큼 지쳐있었다.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과의 마찰 그리고 결혼하고 20여 년 가까이 쉬지도 못하고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무심해져 버린 나의 일상이 뒤틀리고 있는 중이었다.
퇴근하고 집에 오면 TV에 매몰되었다가 저녁 먹은 뒤 잘 시간 되면 잠들었다가 다음날 찌뿌둥한 컨디션으로 다시 출근하는 일상이 점차 지겨워졌다.
회사에서 보내는 시간이 견딜 수 없을 만큼 무의미하게 느껴졌고 주말이라고 특별히 다르지 않은 나의
생활패턴에 변화를 주고 싶다는 강한 충동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산티아고 순례길.
이 생소한 길에 대해서 알게 된 건 10여 년 전이다. 우연히 순례길에 관한 김남희 작가의 여행기를 읽게 되면서 처음 알게 되었고 읽는 내내 나의 심장은 콩닥거렸다.
프랑스 생장 피에드 포드에서 시작하는 산티아고 순례길은 스페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800km를 걷는 긴 여정이다. 어떻게 800km를 걸어서 갈 수가 있다는 말인가? 책을 읽는 동안에는 그저 여행작가니까 가능하겠다고만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나는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한동안 산티아고 순례길은 내 기억에서 밀려나있었다.
그러다 40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점차 나의 삶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떤 가치관을 갖고 나의 인생을 마주해야 하는지 그제야 나를 돌아보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때 비로소 잠시 쉬어야 하는 시간이 왔음을 알았다.
내 기억 속에 넣어두었던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해 떠오르면서 그 길을 걸어보고 싶다는 두근거림이 일었다.
이제 아이들도 어느 정도 자기 할 일을 스스로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으니 마음의 부담 없이 떠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보통은 산티아고 순례길을 한 달 정도를 걷지만 나는 체력이 좋지 않으니 50일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남편에게 앞으로 6개월 뒤 퇴사를 하고 50일 동안 산티아고 순례길을 가겠노라 통보했을 때 남편은 산티아고 순례길이 걸어서 가는 길이라는 걸 전혀 몰랐다.
왜 50일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한 건지도 전혀 몰랐다..
순례길에 대한 간략한 정보를 알려주고 혼자 걷고 오겠다고 했을 때 다행히 남편은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
아마 옆에서 지켜봐도 많이 지쳐 보였을 것이다.
남편은 안된다는 말을 하지 않고 조심히 다녀오라고 응원해 주었다.
그런 남편의 얼굴을 보니 어느새 내 앞에는 청년이었던 남자가 배 나온 중년의 남자가 되어 있었다.
흰 머리카락도 많이 생겼고 얼굴의 주름도 늘었으며 그의 얼굴도 늘 피곤함이 묻어 나왔다.
남편도 결혼하고 지금까지 쉬지 않고 가족들을 위해 달려왔는데
나 혼자 가는 건 남편에게 너무 의리 없는 행동이 아닐까 하는 미안함이 밀려왔다.
“자기야, 생각해 봤는데 우리 같이 갈래? ”
“뭐? 그럼 회사는?”
“둘 다 때려치우고 가자. 순례길 갔다 와서 다른 회사 찾아보면 되지. 50일 외국 갔다 온다고 뭐 크게 문제가 있겠어? 다시 취업하면 되지. 월급 기준만 낮추면 들어갈 곳 많을 거야. 자기도 쉴 때가 되었어. 그동안 애썼잖아. 같이 걸으면서 쉬자.”
나의 제안에 남편은 적잖이 당황했다. 한 번도 은퇴 전까지 퇴사라는 걸 고려해 본 적이 없었는데
걷기 위해서 퇴사를 같이 하자고 권하는 아내라니.
남편은 꼬박 하루를 고민하더니 같이 가는 것에 동의했다.
아마도 아내를 먼 외국에 그것도 혼자서 50일 동안 걷게 한다는 게 마음에 걸린 모양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아내의 반대가 아닌 아내의 권유로 퇴사를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니 남편에게도
크게 손해 보는 건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퇴사를 마음먹고 천천히 순례길 떠날 준비를 했다.
우리들의 생애 첫 해외여행이다. 무려 50일을 걸어야 하는 그런 여행인 것이다.
이 무모한 도전 같은 산티아고 순례길의 여정을 이제 시작해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