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를 더 사랑하지 못한 과거의 나를 용서해요. 식품생명공학도 L.
지난여름, 불쾌지수가 최고조에 달하는 장마 시즌에 L을 만났습니다.
젖은 청바지가 피부의 일부처럼 달라붙어도 광화문 씨네큐브로 옮기는 발걸음이 산뜻했어요.
(사실 꿉꿉하고 힘들긴 했어요.)
그래도 돌아보니 완전 로또 맞은 날.
두 명의 파워 집순이가 장대비를 뚫고 영화관에 갈 확률은 복권 당첨보다 희박하니까요.
홈 러버,홈 바디라면 공감하시죠?
극적인 만남이 성사된 날 함께 본 영화는 웨스 앤더슨 감독의 최신작 ‘애스터로이드 시티’
시작과 동시에 주인공 가족이 탄 자동차가 고장 나고 원자폭탄 실험이 이뤄지는 의뭉스러운 미국 사막 도시 한가운데서 발이 묶여요.
그리고 두둥, ‘무언가’와 조우하죠. ‘무언가’의 정체를 확인하는 즐거움을 빼앗지는 않을게요.
마을에 고립된 면면이 사별, 우울, 심상치 않은 사연을 품고 있지만 배우들은 역시나 웨스 엔더슨 식 무표정으로 일관해요.
감동과 슬픔, 분노와 회한, 혹은 기쁨, 그 무엇도 강요하지 않죠.
그로 인해 덜 분명하고 때로는 난해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관객이 스스로 감정이 갈 길을 선택할 수 있어요.
집요한 대칭의 미쟝셴과 솜사탕 같은 색감이 끈적하게 괴롭히는 사건들을 한 번 가볍게 깎아 내기도 하고요.
거친 현미밥을 소화하느라 힘들일 필요 없이 잘 도정된 흰쌀 밥 한 공기를 맛있게 먹을 수 있다는 게 웨스 앤더슨 영화를 보는 묘미죠.
그날 L과의 대화도 함께 본 영화처럼 흘렀어요.
L의 지난 기억을, 또 닮은 제시간을 토이카메라로 찍어 들여다봤죠.
삶의 질곡을 완벽한 대칭성의 동화로 만들어 보고 나니,
각자가 지고 사는 멍에가 그렇게 별스럽지 않더라고요.
(라고 쓰는 지금도 눈물이 고이려 하지만…센 척 좀 해보고 싶네요)
이렇게 무심할 만큼 별거 아닌 삶에서 온갖 별것을 이고 지고 사는 우리에게 L의 이야기를 공유합니다.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한 시간을 지나온 분들, 지나고 계신 분들께 작은 위로가 되기를.
‘나’만 겪는 시간이 아니에요. ‘우리’가 함께 싸우고 있어요
첫 번째 질문,
L이 삶에서 가장 후회하는 순간이 언제예요?
첫 질문부터 어렵네요.
>어렵나요? (웃음) 대부분 ‘후회’라는 키워드를 꺼리시더라고요. 그렇지만 전 후회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고 애써 다른 감정으로 덮어두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만족만 하고, 사람이 또 어떻게 앞만 봐요. 치열하게 앞을 보는 만큼, 차분하게 뒤도 보고, 후회를 인정해 봐야 나를 위한 진짜 기준을 세울 수 있는 거잖아요.
어렵더라도 지금만큼은 고민해보고 나눠 주실 수 있을까요? 가장 후회하는 한순간을?
음, 가장 후회하는 순간.
(한참 고민한 끝에)
지금 떠오르는 건 ‘내가 날 사랑해 주지 못한 때’인 것 같아요.
>나를 사랑하지 못한 순간이 언제였나요?
고등학교 때가 떠올라요.
전 어릴 때부터 공부를 잘해야만 사랑받을 수 있었어요. 기대를 충족하지 못하면 존재 의미가 없다고 느꼈죠.
착한 딸로 계속 부모님의 관심을 받기 위해서, 집에서 가치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 공부했어요.
당연히 부모님이 정해 주신 좋은 고등학교에 들어갔고요.
고등학교에서 전원 기숙사 생활을 해서 부모님과 떨어지게 됐는데, 그때부터 처음으로 내가 바라는 삶이 뭔지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그전엔 생각할 틈도 없었거든요. 이거 다음은 저거. 그다음은 또 저거. 부모님이 다 정해 놓으셨고, 저는 그 길을 따라서 정신없이 달리기만 하면 됐는데, 난생처음 가족을 떠나 혼자 지내면서 모든 실시간 이정표와 감시를 동시에 잃었죠.
그렇게 되니까 내가 뭘 하고 싶은지 한 번도 묻지 않고 몰아치신 어머니 아버지가 밉더라고요. 그렇게 공부를 포함한 모든 활동을 놨어요.
내 의지로 걸어온 길이 아니란 걸 알리고 싶었거든요.
엄마 아빠가 정해 놓은 ‘의사’라는 꿈, 강요하신 길을 모든 수단으로 부정하면서요.
그런데 지금은 그때를 가장 후회해요.
>입시 결과 때문인가요?
아니요. 가고 싶은 대학을 못 가고 뭐 이런 결과적 관점에서 후회하는 게 아니고요. 날 사랑해 주지 못한 게 속상해서 후회해요.
스스로를 사랑했다면 다른 방식을 찾았을 것 같거든요.
돌이켜보면 자해를 한 것과 다를 게 없잖아요. 날 망치는 걸 보여 주면서 내 마음 좀 알아줬으면 한다는 게.
그래서 지금은 그때의 저를 좀 후회해요.
‘나 좀 아껴줄걸. 그랬으면 다른 선택을 했을 텐데..’
다시 돌아오지 않을 그 시간이 참 아쉬워요.
>저라도 돌아가서 아끼고 안아주고 싶네요. 그런 시간을 지나 왔으니까 지금은 훨씬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게 되었잖아요. 장해요. 잘 견뎌 왔어요.
그리고 조금 관련 없는 얘기지만 전 드라마나 영화에서 중고등학교 때를 막 푸릇, 산뜻한 시절로 그리는 걸 보면 살짝 분노가 일더라고요(웃음)
분노까지요? (함께 웃는다)
>내 학창 시절은 안 그랬는데, 미디어가 박탈감 느끼게 하잖아요(웃음) 짙은 다크서클에 야자, 야야자에 찌든 시간들만 잔뜩 생각나고 알콩달콩 말랑말랑한 부분이 하나도 없었는데 말이죠.
(웃음) 그렇긴 해요 저도.
알콩달콩 말랑말랑하니까, 그와 연관된 두 번째 질문을 해볼게요.
L은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사랑.
사랑은 늘 제 주위에 머물러 있는 것이죠.
>그게 무슨 뜻인지 조금 더 설명해 주실래요?
저는 평생 사랑을 갈구해왔어요.
단 한 번도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아본 적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부모님의 사랑마저 그분들의 요구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죠.
그래서 항상 두려웠던 것 같아요. 사랑 못 받고 자란 애라는 걸 남들한테 들킬까 봐.
전전긍긍했어요 항상.
그런데 저는 사랑이 사실 저를 항상 둘러싸고 있었다는 걸 요즘에야 깨달았어요.
제가 인생에서 가치를 두는 게 사랑이니까, 그래서 자꾸만 그 개념에 목을 맨 거잖아요.
또 내가 타인을 많이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만큼을 받기를 기대한 거기도 하고요.
그런 면에서, ‘너무 일방향에만 집중했던 건 아닐까’ 해요.
그러니까 내가 받는 쪽만 사랑이라고 인식했던 것 같다는 말이에요.
사실 주는 것도 사랑이잖아요. 받는 것 못지않게.
전 아이돌 덕질도 계속해왔고, 취미도 많은 데다가 늘 무언가에 애정을 쏟는 데 진심인 상태예요.
저는 사랑”하는” 재능을 타고났고, 그러니 사랑이 늘 제 곁에 머물렀던 거죠.
이걸 깨닫고 정말 많이 바뀌었어요.
물론 아직 완벽하게 받는 사랑을 갈구하지 않는다고 할 순 없지만, 전보다는 확실히 여유가 생겼어요.
>완벽하게 다 해내는 상태만 바람직한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바라는 이상이 있고, 그걸 될 때까지 스스로마저 속이면서 연습하는 거예요.
저도 아는 분께 들었는데 “Fake it until we make it.” 이래요.
그러다 보면 언젠가 바라는 상태에 도달해 있지 않겠어요? 연습해야죠. 계속.
처음에 잘 안된다고, 평생 그럴 거라 속단하면 안 된다는 게 제 생각이에요.
맞아요. 좋네요. Fake it until we make it.
세 번째 질문입니다.
L에게 여지없이 늘, 확실한 기쁨을 주는 게 있나요?
음. 또 어렵네요. 먹는 걸 좋아하지만 그건 답이 안 되고. 여지가 없어야 하니까.
>왜 음식은 안 되나요?
먹는 건 제게 항상 기쁜 일은 아니거든요.
이것도 역시 부모님 이야길 꺼내게 되는데, 엄마가 제 외모에 상당히 엄격하세요. 한 번은 같이 가족여행을 가게 돼서 다 같이 계획을 하는데, “너 그러고 갈 거니?” 하시는 거예요.
>‘그러고’ 라니요?
‘살찐 상태로 갈 거냐’는 말씀이었죠.
그 순간부터 가족 여행이 하나도 즐겁지 않았어요.
사진도 안 찍게 되고, 그나마 찍은 사진들마저 쳐다도 안 봐요.
>그런 기억이 있었군요. 어쩌면 딸들에겐 어머니가 가장 가혹한 존재인 것 같아요. 혹시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라는 영화 보셨나요?
아뇨. 그게 뭐예요?
>정말 다양한 이야기를 다루지만. 결국 중심에 있는 건 어머니와 딸의 이야기예요. 영화 내내 어머니가 딸에게 “너 요즘 살쪘다.” 같은 외적인 공격을 계속해요. 그게 관심의 표현이자 건강에 대한 염려지만 딸에겐 상처가 되죠. 그렇게 서로에게 상처만 남기던 모녀 앞에 모든 가능성을 품은 무한의 멀티버스가 열려요.
그리곤 어떻게 되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남아 서로의 곁에 있길 선택해요.
음, 조금 뻔한데요.
>선택과 결론은 클래식이긴 하지만 그 영화의 표현 방식만큼은 ‘뻔하다’의 분명한 반의어예요. 그리고 마냥 진지하지만은 않은 B급 코드가 너무 매력적이죠. 나중에 한 번 보세요. 작년 한 해 제겐 최고의 영화였습니다.
최고의 영화로 꼽으시니 꼭 봐야겠네요.
음, 그리고 주신 질문에 막 떠오른 답을 하자면,
저한테는 ‘성취’가 유일하게 여지없는 기쁨인 것 같아요.
>어떤 성취가 있을까요?
꼭 큰 게 아니어도 돼요. 예를 들면, 일주일 내내 운동하기, 하루에 물 다섯 잔 마시기.
스스로가 설정한 목표를 이루기만 하면 되죠.
저와의 약속을 지키고 나면, 목표의 크기와 상관없이 늘 기쁘더라고요.
그건 음식도, 음악도 제게 해줄 수 없는 것들이에요.
>어…이 답변 제가 훔쳐도 될까요? (웃음) 저도 나름의 논리로 생각하는 답이 있지만, L의 이야기가 더 멋진걸요?
어떤 답을 갖고 계신데요?
>그건 비밀입니다. (웃음) 제 이야길 많이 하면, 인터뷰이 분들이 다음 질문에 답하실 때 영향을 받으실까 걱정이 돼서요. 제 생각이 많이 드러날수록 남은 질문들이 마치 출제자의 의도가 있는 문제 같잖아요. 그러니까 인터뷰 다 끝나고 L에게만 살짝 알려드릴게요.
음, 일리가 있네요. 네, 좋아요. 끝나고 알려주세요.
네 번째 질문입니다.
이번엔 두려움을 이야기 해볼까 해요.
L은 삶에서 가장 두려운 게 뭔가요?
전 과거의 기억이 제 발목을 잡는 게 제일 두려워요. 지금으로서는.
>다른 설명이 없어도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요.
지금은 그래도 정서적으로 안정을 많이 찾은 상태지만 언제든 과거가 다시 저를 밑바닥으로 끌어내릴 수 있다는 불안이 있어요.
시간이 약이라고 들 하잖아요. 근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없어지지 않는 것들이 있더라고요.
살면서 하지 않았어도 되는 경험. 저한테도 몇 가지 그런 기억들이 있는데, 그게 언제고 다시 절 괴롭힐까 봐 늘 두려워요.
>맞아요. 절대적인 시간으로 치유되지 않는 기억은 분명히 있어요. 그런데 그런 순간들이 다시 L의 발목을 잡게 될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제가 감히 단언한 건, 이 말이 주문 같은 효력을 가졌으면 해서요. 지금 제가 주문 걸었어요
두려움을 이어서 다뤄 볼게요.
다섯 번째 질문,
L은 죽음을 두려워해본 적이 있나요?
이 질문을 받게 되니까 제 인생을 혹시 들여다보신 건 아닌가, 조금 놀랐는데요.
>네? 왜죠?
사실 전 죽음이 낯설지 않아요. 어쩌면 삶보다 죽음과 더 친숙하게 지내 왔거든요.
거기엔 분명한 외부 요인도 있고요, 타고난 부분도 있는 것 같아요.
>이야기하고 싶은 만큼만 하셔도 돼요.
네, 그럴게요.
아마도 기억하기로는,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죽음을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냥 단순히 개념을 인지했다는 게 아니라 적극적 시도를 시작했어요.
이후로 계속 상담도 받고, 정서적 안정을 찾으면서 ‘죽고 싶다’는 생각을 안 한 지 꽤 됐거든요? 그래서 ‘이젠 안 나나 보다’ 했는데, 얼마 전에 베트남으로 여행을 다녀오는 길에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어요.
비행기에서 엄청난 난기류를 만났는데, 요동치는 와중에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지는 거예요. ‘내가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죽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스쳤거든요. 잠깐이긴 했지만.
죽음은 저한테 내내 가까웠던 존재예요. 삶이 노력이었고, 죽음이 디폴트인 거죠.
> 음,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용기가 존경스러워요. 저였다면 못했을 거예요.
(웃음) 이 얘길 누군가에게 꺼내는 건 저도 처음이에요. 이 대화가 저한테도 참 중요한 순간이 될 것 같네요.
벌써 여섯 번째 질문이네요.
최근 스스로에게 되뇌는 문장이 있나요?
있죠.
‘내 알 바 아님.’
이 문장을 최근 가장 많이 떠올려요.
그런데 꼭 타인에게만 쓰는 문장은 아니에요. 나 혼자 생각이 많아질 때면 스스로에게도 써요.
‘내 알 바 아님.’
감정이 너무 복잡하게 치달으려고 할 때, 스위치를 탁 끄는 거죠.
아까 될 때까지 연습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잖아요. 정말 공감한 게 이 문장도 효력을 가질 때까지 한참 걸렸어요. 아무리 알 바가 아니라고 읊조려도, 생각 스위치가 안 꺼지는 거예요. 그래도 많이 연습했더니 정말 효력을 갖더라고요.
그래서 이 문장 덕분에 최근에 아주 가벼워요. 과거의 실수들이 막 떠올라서 ‘으, 그때 왜 그랬지’ 하게 되면 재빨리 ‘아, 내 알 바 아님’ 해버려요.
>맞아요. 가끔 보면 타인의 감정과 판단의 영역까지 내가 짐을 지려고 할 때가 있잖아요. 그럴 땐 정말 말씀하신 ‘내 알 바 아님’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건 그 사람의 소관이지,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해서도 안 되죠.
타인을 주제로 두 가지를 묻고 싶어요.
먼저 일곱 번째 질문,
가장 싫어하는 타인의 행동이나 모습이 무엇인가요?
질문을 듣자마자 떠오른 건 내 단점이 다른 사람에게 보일 때죠. 그런데 정확하게 말하자면 싫기보단 찝찝한 것 같아요.
내 자격지심을 확인하는 기분?
요즘 유행하는 일반인 연애 예능 프로그램 같은 거 보면 가끔 깔창이라든지 뭐 자기한테 외적으로 없는 부분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사람들이 나올 때가 있잖아요. 그럴 때면 외모에 강박적이고 자신 없는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것 같아서, 더 초라하게 보일 때가 있어요.
그런데 내게도 있는 부분이라는 걸 아니까 싫어하지는 못하고, 왠지 씁쓸한. 그런 기분이 들죠.
그런데 막상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계기는 역시 완벽해서가 아니라 이런 부족이나 흠이 드러났을 때인 것 같은데 말이죠.
아무튼 질문은 ‘싫은 점’ 이었으니까, 더 정확히 답하자면, 전 어른들한테 예의 없는 모습 보이면 싫더라고요. 좀 재미없고 흔한 답이죠?
>흔한 건 없어요. 충분히 흥미로운 답이에요. 놀랍게도 스스로가 흔하다고 생각한 점들이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아요. 다 비슷비슷하게 사는 것 같아도, 중시하는 점, 삶의 태도, 모든 것들이 제각각이거든요. 왜냐면 단 한 가지를 골라야 하잖아요. ‘가장’이라는 말이 질문에 붙었으니까. 그 많은 일반적 답안지 중에서도 본인이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하나만을 고르게 되면, 천차만별의 답변이 나오더라고요. ‘아, L은 사람 간의 특히, 연장자에 대한 예의를 중시하며 사는구나‘하고 느끼는 거죠. 절대로 ‘흔하다’, 혹은 ‘독특하다’는 평을 하려는 질문이 아니에요.
자, 싫은 점에 이어서 세트로 묻습니다.
여덟 번째 질문,
타인에게서 발견했을 때 가장 좋았던 모습이나 행동은 무엇인가요?
전 경청하는 사람을 발견하면 정말 좋더라고요. 세상에 스피커는 참 많은데 리스너가 없어요. 그래서 간혹 남의 말을 참 잘 듣는구나 싶으면 그 사람이 그렇게 좋아 보이더라고요.
>적극 공감해요. 저도 본 투 비 투머치 토커였는데,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궁금해지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거든요.
게다가 이 인터뷰를 시작하면서 듣는다는 게 오랜 연습과 내공을 필요로 하는 일이라는 걸 더욱 절실히 느껴요, 그래서 답변에 공감하게 되네요.
이제 타인으로 돌렸던 시선을 다시 ‘나’에게 돌리면서 인터뷰를 마무리해 볼까 해요.
마지막 질문입니다.
지금 이 순간, 본인을 영화 속 주인공이라고 설정해 볼게요. 무슨 영화의 어떤 캐릭터가 좋을까요?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의 주인공 율리에가 떠오르네요.
인생이 꼬여 있기는 영화 주인공이나 저나 똑같거든요. 그런데 ‘아, 얘처럼 꼬인 게 낫다.’는 생각이랄까. (웃음)
무슨 소리냐면, 영화 속 인물도 저도 생각이 참 많고 잔뜩 뭉친 고민 속에 살아요.
그런데 다른 점은, 전 고민을 한가득 끌어안은 채 방에 머물러 있고, 율리에는 삶의 굵직한 결정만큼은 서슴없이 내리고 움직인다는 거예요.
그렇다고 그 결과가 다 성공적이지도 않지만, 그 실패마저 시도 이후에나 확인할 수 있는 훈장인 거잖아요.
그걸 또 주인공이 쿨하게 받아들이고요.
사실 영화는 비현실이니까 완벽하고 번쩍번쩍한 주인공들이 많잖아요. 그런데 저를 투영하고자 한다면, 그런 인물들보다는 약간은 비슷한 듯 제게 없는 단 한 가지를 지닌 인물이었으면 하는 마음이에요. 그래서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의 주인공이 떠올랐어요.
>생각하는 사람이 결단력과 행동력마저 갖게 된다면, 그거야말로 슈퍼히어로 아닌가요? 조만간 세상을 구하시겠는데요? (웃음)
여기까지가 지난 여름 L 과 나눈 대화입니다.
부풀리는 공작새들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투명하게 결핍을 이야기하는 L이 정말 슈퍼히어로 같았어요.
누구보다 용감한 L과 카페를 나서며, 같이 럼주가 들어간 초콜릿을 사 먹었습니다.
지금도 그날 함께 맛본 초콜릿처럼 달콤한 하루를 보내고 있기를.
L을, 그리고 L과 닮은 기억을 가진 모두를 위해 소망하며 첫 번째 인터뷰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