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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지 말고 일어나 피리를 불어라!!!

by 산들바람
소리가 다소 클 수도 있으니 밖이라면 이어폰이나 헤드폰을 이용하고 소리를 조금 줄여듣길 바랍니다. 집에서도 그렇구요...

이러한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혹시라도 연세가 지긋하신 분들은 늦은 밤 들리던 이 소리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기괴하리만큼 생소한 이 소리는 오래전 추억 속으로 사라져 버린 시각장애인 '안마피리'소리이다.

을사조약 체결 이후 1914년 10월 29일, 일본은 제생원 맹아부를 만들어 시각장애인에게 안마와 침구 등의 일을 가르쳐 안마사를 배출하게 된다.

일본에서 조선으로 건너와 사는 일본인들을 상대로 일부 일본인 안마업자들은 주택이나 상가를 임대하여 안마원 형태의 사업을 시작했어도 조선의 안마사들은 저녁시간 일본인들이 밀집한 주택가에서 안마피리(소적)를 불며 그들의 요청이 있을 때마다 안마를 하여 생계를 이어갔다.

1920년대에 이르러 일본인들이 주택에 전화기를 설치하여 호출이 있을 때마다 안마사들을 출장 보내는 형태의 안마업을 시작하면서 무작정 밤거리를 돌아다니던 맹인들의 형편이 훨씬 나아졌는데 그 당시 서울에는 서천당, 고삼당, 니시카와당이라는 일본인 안마원이 존재하였으며 최초의 일본인 안마원은 1900년에 인천에서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시작된 것으로 일본 맹인이었던 이카다타로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러나 해방이 되고 미군정이 들어선 후 맹인 안마는 불법이 되었으니 그들은 먹고살기 위해 또다시 길거리를 쏘다니며 안마피리를 불어야 했다.

여름은 여름대로 겨울은 겨울대로 또 비가 오면 오는 대로 앞이 보이지 않는 맹인이 피리를 불며 길거리를 헤매는 형상은 거의 걸인에 가까운 모습이었으리라....

한겨울엔 안마 피리에 고드름이 주렁주렁 매달려 도 맨손의 시각장애인은 손가락이 얼고 감각을 잃어 그것을 알아차리는 일도 쉽지 않을 뿐 아니라 지나는 사람은 그들이 가까이 닿기라도 할까 겁을 내며 청계천으로 자빠져 허우적대도 돌부리에 걸려 얼굴이 찢어져도 아는 체 조차 하지 않는다.

며칠을 그렇게 기괴하고도 구슬픈 피리 소리를 내고 다니다 안마를 받겠다는 사람을 겨우 한 사람쯤 만날 수 있을 정도지만 그렇다고 산 입에 거미줄을 치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서 배운 일이 안마였고, 그것만이 장님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생계유지 수단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돈을 벌어 모은 돈으로 6명의 안마사들이 주식회사 형식의 협회를 결성하고 안마사 자격에 대한 입법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1956년 11월 19일 종로구 낙원동 218번지 2평여 되는 낡은 다다미방에서 예약 전화를 받고 고용된 시각장애인 안마사를 파견하게 되었다.

이후 1962년 5월 12일, 교보문고 뒤편의 여관을 개조한 '제일안마시술소'가 개설된다.

그리고 한, 일 수교를 기점으로 한국으로 관광을 온 일본인이 호텔에 묵으며 안마사를 부르게 되고 호텔에 고용되어 대기하던 안마사가 해당 호실에 들어가 안마를 하는 업태가 형성되었다.

나의 남편 또한 첫 직장이 조선일보 건물 내에 있던 코리아나 호텔이었으며 넥타이를 매고 양복을 멀끔하게 차려입고 대기실에서 쉬고 있다 자신의 차례가 되면 호텔직원의 팔을 붙들고 해당 객실에 들어가 안마를 했단다. 그 당시 거의 대부분인 일본인 고객에 대한 원활한 서비스를 위해 일이 없는 시간엔 종로의 일본어학원을 찾아 일본어를 익히며 열의를 불태웠다고 한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아시아의 떠오르는 네 마리의 용(대한민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이라는 별명이 붙으며 개발도상국가로 도약하던 시기였고 안마업계 또한 유래없는 호황기를 맞으며 안마사들의 경제적 수준 또한 높아졌다.

그와 동시에 성매매업과 안마업을 함께 하는 '안마시술소'도 번성기를 맞게 된다.

우리나라 성매매업에 대한 역사 또한 유구하지만 각설하고 2000년, 김강자 종암경찰서장이 '한국의 포청천'. '저승사자'라 불리며 주변 지역 성매매 업소를 대거 소탕하였기에 '성매매 특별법'은 이른바 '김강자법'이라 할 만큼 성매매 업소 척결 의지가 대단했다.

이십 대 초반인 나로서도 텔레비전에서 경찰제복을 입고 단상에 서서 성매매 업소에 대한 대대적인 소탕작전을 펼칠 것을 강하게 시사하는 그녀의 모습이 강하게 뇌리에 박힐 정도였다.

그 후 우리나라 국민들도 성매매가 불법이라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혀갔고, 그와 함께 시각장애인 안마사들이 운영하는 안마시술소 또한 철퇴의 대상이 된 것은 물론이었다.

그러나 안마시술소를 성매매업소로 규정하여 없애는 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 안에서 일하는 수많은 시각장애인 안마사들의 생존이 걸려있는 문제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들 사이에서도 안마시술소에 대한 자정의 목소리가 높아지며 현재는 그 세가 확연히 줄어든 것만은 사실이지만 거의 모든 안마사들이 시술소 밥을 얻어먹고 살았던 정서가 있어 함부로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시각장애인 안마의 역사가 시술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시술소처럼 큰돈을 만질 수는 없어도 일반 안마원 또한 발전하는 시기였다.

물론 그만큼의 양적 성장과 함께 치열한 고객유치를 위해 호텔, 여관 등의 숙박업소에 리베이트 경쟁이 심화되는 부작용도 만만치 않던 시절이었다.

또한 비시각장애인의 안마, 마사지 자격을 합법화하라는 목소리와 부딪히며 시각장애인들은 그들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 처절한 몸부림으로 그에 맞서왔고, 지금까지 국가에서는 시각장애인에게만 국가공인안마자격을 부여하고 있지만 이제 세상은 바뀌어간다.

합헌이던 불법이던 비시각장애인 마사지 시장은 손을 쓸 수 없도록 거대해졌고 100년 세월 동안 시각장애인을 위한 유보직종이던 안마업은 이제 사양길을 걷고 있다.

오히려 시각장애인이 유일한 국가공인 안마 자격을 가졌으며 그 외는 불법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들이 거의 대부분이다.

시각장애인이 비장애인의 자본력과 기획력, 시각적 감각과 아이디어를 따라가기에는 턱없이 부족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들 사이에서는 적어도 비시각장애인보다 10~20년 세월이 뒤쳐진다고들 이야기할 정도다.

어찌 되었든 거대한 시장의 변화를 막을 수 없다면 그에 대한 대책은 세워져야 하지 않겠는가....

정부 차원에서의 사회적 일자리 창출과 그에 따른 보건안마에 대한 요구를 바탕으로 경로당 안마사 파견사업과 더불어 2007년 4월 1일부터 전국 19개 시, 군, 구 23개의 사업장에서 안마 바우처 서비스에 대한 시범 사업이 시작되었다.

우선 바우처(voucher)라는 단어의 어원은 프랑스에서 유래되었으며 '증명하다'라는 뜻에서 영어의 '증명서', '영수증', '상품교환권' 등의 의미로 변이 되었다.

특히 이는 일정한 조건을 갖춘 소비자(주로 사회보장제도 대상자)에게 정부적 차원에서 정부가 보증인이 되어 각 업체에 해당 대상(교육, 주택, 의료 등)에 대한 서비스 이용권을 부여하는 것인데 자칫 직접적인 현금성 서비스가 그 취지에 맞지 않게 변질되는 것(불법 도박 또는 무분별한 소비형태로 인한 탕진)을 막기 위한 방편으로 시행되었다.

국내에는 산림 복지바우처, 에너지 바우처, 임산부 바우처, 스포츠 바우처 등의 190여 가지의 서비스가 지원되는데 그중 '국가 공인 안마바우처'는 보건복지부와 지자체에서 선정한 지역 내 어르신들과 뇌병변 장애인들에게 전신안마, 마사지, 지압, 운동 요법, 그 외 기타 자극요법 서비스를 제공하고, 시각장애인에게는 일자리 창출에 도움을 주겠다는 취지에서 시작한 사업이다.

신청자격은 만 60세 이상의 몸이 불편한 어르신(대부분은 허리, 어깨, 무릎 등의 만성질환을 앓고 계시기에 거의 모든 어르신이라고 보면 된다)중 중위소득 150% 이하의 소득 수준, 국가유공자 상이등급(나이 무관), 지체 및 뇌병변 장애인(나이 무관), 희귀 난치성 질환자(나이 무관)가 그 대상이다.

특정기간 동안 주민센터에서 접수를 받고 있으며 필요서류(의사진단서, 소견서, 처방전 중 택 1, 신분증, 건강보험증 중 택 1, 복지카드(해당자에 한함) 등을 지참하여 방문하면 된다.

의료적 서류가 필요한 이유는 질병분류 코드를 확인하기 위함인데 G(신경계통 질환), M(근 골격계통 질환), I(순환계통 질환)의 질병코드가 필요하며 발급일로부터 3개월을 경과하지 않아야 한다.

주민센터에서 접수를 마친 해당 서류를 시, 도, 구청이 취합하여 심사과정을 거치고 대상자로 선정되면 등기우편으로 안내장과 '행복 나눔 카드'를 발송하는데 안내장에는 바우처 수행기관으로 등록된 가까운 지역 안마원의 상호와 카드 이용 방법에 대한 설명을 첨부한다.

2024년 기준, 주 1회 60분씩 한 달 동안 4회에 한해 이용할 수 있으며 미처 이용하지 못한 서비스는 익월로 이월된다.

비용은 한 달 기준 월 16만 8천 원이지만 이 중 90%(151,200원)는 정부에서 지원하며 나머지 10%(16,800원, 1회당 4200원)만 부담하면 되는 제도이다.

이때 90%에 해당하는 151,200원은 서울 기준 50%는 보건복지부에서 지원하고, 25%는 서울시, 나머지 25%는 해당 지자체(구청)에서 지원하는데 군, 면 단위 지방은 보건복지부에서 70%를, 군청 등에서 30%를 지원한다.


우리가 운영하는 안마원이 있는 지자체에서는 나의 남편이 2010년 1월쯤 직접 구청장을 찾아가 안마바우처 서비스에 대한 설명과 서비스 도입에 대한 건의를 하였으며 이를 흔쾌히 받아들여 2010년 6월 1일부터 우리 지자체에서 이 사업이 시작되었고, 첫 손님을 맞이하게 되었다.

당시만 해도 해당 사업에 대해 잘 몰라 거의 대부분의 안마바우처 고객이 우리 집을 찾았었는데 소문이 돌며 이 사람, 저 사람이 수행기관으로 등록하고 사업장 이전까지 하는 등 지금은 그 수요가 훨씬 줄어들어 바우처 사업만으로는 입에 풀칠조차 하기 힘든 실정이다.

그마저도 처음 시행하였을 때는 서비스 기간이 6개월이었고, 몇 년 후 10개월로 기간이 연장되다 재작년부터 12개월로 연장되었는데 지원금은 한정되어 있고(각 지자체의 재정상태에 따라 다름) 거주하는 노인 인구도 달라 그만큼 대상자 선정이 치열한 곳도 많다.

지자체마다 이미 서비스를 이용한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는 경우도 있지만 우리가 운영하는 사업장의 지자체에서는 언젠가 한 번만 가능했고, 올해는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받았다고 한다.

보통의 경우 한시적으로(연말이나 연초, 3~4일간) 신청을 받지만 어떤 지역에서는 상시 접수를 받는다고 하니 해당 주민센터에 문의하는 것이 가장 정확한 방법이다.

하지만 위에서도 말했듯 한정된 빠듯한 지원금으로 여러 업체를 통해 서비스를 이용하다 보면 예를 들어 각 10명씩 10군데의 수행기관에 방문하는 대상자가 있더라도 1,680,000원의 소득이 전부이다.

같은 지역은 교차이용이 가능하기에 서울 지역은 타 지자체에서도 이용 가능하지만 대부분 가까운 지역을 이용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물론 지방은 바우처 사업으로도 수익성이 충분한지 모르겠지만 서울지역은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이미 시각장애인 안마사업은 비시각장애인에게 잠식 당해 사양길에 접어들어가는 상황인지라 이 또한 그들의 수익창출에 뾰족한 대안이 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다.

이를 타개하기 위한 방편으로 작년부터 '산모 바우처'를 이용해 국가공인자격 등록 되어 있는 안마원을 통해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개선되었고, 공무원 복지 포인트를 이용할 수도 있지만 홍보가 제대로 되지 않아 이용하는 수가 그리 많지 않다.


아직 시각장애인에 대한 우리 사회의 폭넓은 이해가 부족한 환경 속에서 그들이 설 자리를 잃고 기초수급권자로 내몰려 사는 것에 만족해야 한다는 사실이 참으로 씁쓸하기만 하다.

스페인의 경우 복권 사업을 시각장애인의 유보직종으로 인정하고, 다른 나라에서는 시각장애인이 다른 직업을 갖는데 대한 사회적 환경 또는 비시각장애인이 장애인을 바라보는 사회적 편견이 적어 우리나라와는 대조적이다.

그나마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안마원은 사십 대 초중반의 시각장애인 세대가 지나면 거의 사라질 듯하고, 그나마 '헬스키퍼'라는 직업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젊은 시각장애인이 대부분인데 이는 기업에서 시각장애인을 고용하는 형식이기에 시각장애인은 안마업에 대한 주도권을 잃고 피고용자의 입장에서 자기 결정권이 없어질 것이다.

요즘은 시각장애인이 다른 직업을 갖는 경우가 조금씩 증가하고 있다지만 얼마나, 어디까지 그 길이 열릴지 알 수 없어 불안한 마음이다.

과연 앞으로 시각장애인은 어떤 일을 하며 살게 될까? 100년을 이어온 안마 사업은 이대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갈까?

오늘 저녁 일을 마치고 남편과 지하철역에서 집으로 걸어오는 길, 영하 10도로 내려간 한파 속에 바람마저 쌩쌩 불어오니 '안마피리'구슬픈 소리가 귓가에 맴돌며 내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시각장애인은 이 사회에서 어떤 위치에 처해 있으며 어떤 길을 걷게 될까?

그들의 인권과 인격은 어디까지 보호될 수 있을까?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바란다!!!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피리를 부는 개구리 왕눈이처럼, 시각장애인 선배들이 길거리를 배회하며 처절하게 불어대던 안마피리 소리를 되새기며 제 목소리를 낼 줄 아는 젊은 그들이 되길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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