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실로암시각장애인 복지관에서는 초등학생 자녀를 둔 시각장애인 가정을 대상으로 한 여행프로그램인 '여름가족캠프' 공지를 올린다.
평소 여행을 가기 힘든 시각장애인 부부,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문화생활을 즐기기 힘든 자녀들을 위한 귀한 배려이다.
초등학교 방학이 시작되는 시점쯤, 2박 3일간 주로 강원도 지역으로 가게 되는데 신청 가정 중 20 가정을 추첨하여 소정의 참가비만 받고 숙소와 간식, 식사 등의 나머지 모든 경비를 주최 측인 복지관에서 부담한다.
특히나 우리는 연연년생의 3남매가 초등학생이던 시절, 둘째의 본격적인 사춘기가 시작되기 전이었던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해마다 참여하던 행사이다.
지원되는 것이 어디 돈뿐인가... 시각장애인 한 가정당 1~2인의 자원봉사자를 매칭해 주어 불편함 없는 여행이 되도록 돕는데 그 행사를 돕는 봉사자들만 해도 100여 명이 넘는 대규모의 행사다.
우리 가정은 남편만 도움이 필요하기에 남자 봉사자를 주로 매칭시켜 주었는데 그 기간만큼은 나 말고도 남편을 도와줄 인력이 있는 데다 식사도 책임져 주니 내가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레크리에이션과 게임, 보트 타기, 바비큐 파티, 고구마 캐기 행사 등등 시각장애인이 스스로 찾아 하기 힘든 프로그램을 구성하고 식사 외 후라이드 치킨, 옥수수, 사발면, 과자 등 간식을 일일이 챙기는 아주 고마운 프로그램이다.
지금은 아이들이 성인이 되고 중, 고등학생이 되어 가지 않지만 우리 아이들의 추억 한편에는 그곳 바닷가에서 모래성을 쌓고 자맥질을 하던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여행 당일 복지관 앞에서 배정된 차에 올라타면 우리 가정에 배정된 봉사자가 우리 가족을 찾아와 자기소개를 하고, 그때부터 서로의 전화번호를 주고 받으며 남편의 화장실 문제, 식사 등을 전담해 도와준다.
우리 막내가 8개월이었던 때 참여했던 캠프에선 연영과에 다닌다는 잘생긴 청년이 배우처럼 예쁜 같은 과 연인과 함께 봉사자로 신청하여 여자친구는 다른 가정을, 그 친구는 우리 가정을 돕게 되었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인지 배우처럼 잘생긴 청년이 우리 봉사자라는 소문이 돌자 저시력인 가정은 물론 전맹 시각장애인들도 괜히 우리 봉사자한테 와서 말을 붙이고 간다.
젊은 청년이라 우리 집 남자 녀석들과 축구도 하고, 탁구도 치며 평소 아빠가 해 주지 못했던 운동을 함께 하고, 아무한테나 잘 안기던 순한 우리 아기도 나 대신 번쩍번쩍 잘 안아주던 그 잘생긴 청년은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문득문득 궁금해진다.
이렇듯 즐거운 추억을 매해 남겨주었던 가족캠프가 올해로 25년째를 맞게 된다.
오늘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는 '시각장애인 복지관 '에 관한 이야기이다.
시각장애인의 삶의 질을 높이고 행복한 삶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복지관' 이야기...
복지관은 노인, 장애인, 저소득층 아동 등의 한정된 대상에게 사회복지서비스를 제공하던 단체였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는 미국 선교사로부터, 기독교 신앙이 유입되고부터 그 유래가 시작된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어쩌면 복지재단, 또는 복지회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YMCA(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가 그 시작점이라 할 수 있다.
산업혁명화로 인해 영국의 도시로 이주한 그 당시 청년들 대부분은 선술집과 매춘소를 다니며 시간과 돈을 소비했다. 그것을 지켜보던 포목공 조지 윌리엄스라는 청년은 도시의 청년들이 건강한 활동이 부족하다는 것을 자각하며 그의 생각을 이야기하던 중 런던 시내의 한 사업장의 동료 11명과 함께 기도와 성경을 읽는 모임을 만들자는 목적으로 1844년 모임이 결성되었고, 그 시작은 아주 작은 사조직에 불과했다.
그 후 1851년 런던 하이드파크에서 열린 세계 박람회에서 호주, 벨기에, 캐나다,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스위스와 홍콩, 그리고 미국에 YMCA가 소개 되었고, 급기야 헨리 뒤낭의 아이디어로 '다 하나가 돼라(요한복음 17:21)'의 성경 말씀에 근거해 국제 조직 형식의 단체가 만들어졌다.
우리나라에는 1903년 10월, 대한 기독교 청년회 연맹이 창립되어 한국 YMCA의 근간을 이루었는데 그 당시는 주로 청소년 활동에 초점을 맞춘 프로그램이 주로 이루어지며 국내에 야구, 농구, 배드민턴, 수영 등이 YMCA를 통해 소개되었다.
지난 글 중 '눈먼 자의 예배당'에서 시각장애인 교회의 태동을 설명하며 밝혔듯 1989년 로제타 셔우드 홀 선교사가 시각장애인 특수교육과 시각장애인 교회와 학교의 포문을 열고, 그 이후 1930년 시각장애인 오현상 전도사에 의해 지금의 남산맹인침례교회(원로 강용준 목사)의 전신인 승동교회 내에 맹인전도반이 개설되면서 맹인 교회가 본격적인 태동이 시작된다.
그 시작과 함께 1970년대부터 장애인 선교 단체가 창립되고 구제사업과 복지 사업이 구체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종로에 위치해 있던 YMCA에서도 남편의 모교인 서울맹학교에 파견되어 각종 동아리 활동을 이끌었으며 수십 개의 선교단체가 장학금을 전달하고, 진로와 점자 교육, 개인적인 봉사활동을 돕기 시작했다.
국내에도 사회복지학의 개념적인 정의가 갖추어지며 예수님의 사랑을 근간으로 행정적이면서도 실질적인 사회복지가 발현되었고, 그 결과로 복지관, 복지회, 연합회 등의 여러 단체로 발전된 것이다.
그중 국내에서 사회복지법인 한국시각장애인복지재단이 설립되고, 그들의 설립 이념인 그리스도 정신에 입각해 1981년 '한국시각장애인 복지관(한시복)이 가장 먼저 문을 열었다.
개관 이후 40여년을 지나오며 시각장애인의 삶의 질을 개선하기 위해 흰 지팡이 무료 지급, 건물내 최초 점자 블록 설치, 점자 교육 등 그 영역을 넓혀 수많은 사업이 진행 중이다.
비시각장애인은 도처에 있는 사설 업장을 이용해 요가도 배울 수도 있고, 수영을 배울 수도 있지만 시각장애인은 집 앞 슈퍼마켓에 들르는 것조차도 다른 이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다. 길가에 수없이 많은 업장에 들어가 자신의 욕구를 충족할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도 슬픈 현실일 수 밖에 없다.
그러니 시각장애인 복지관에서는 점자 도서관, 노인 대학, 노래교실, 클라이밍, 헬스, 악기 연주 등 할 수 있는 사업이란 사업은 모두 시행하는 기관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특히 한시복엔 수영장이 있어 수영을 배우고자 하는 시각장애인이 활동지원사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편하게 수영 강습을 받고, 즐길 수 있는 것이 차별화된 장점이다.
또한 대표적인 시각장애인 복지관으로는 실로암 안과병원 원장님인 김선태 목사님이 설립하신 '실로암 시각장애인 복지관'이 있다.
1998년 12월 개관되었으며 '보냄을 받은 복지관', '보냄을 받은 자'라는 사명으로 시각장애인과 지역사회가 함께 행복을 바라본다는 모토로 개관되었다.
한시복과 함께 또는 차별화되도록 시각장애인을 위한 각종 직업, 재활, 상담, 운동, 음악 프로그램 등의 활동이 이루어진다. 위에 소개한 '실로암 가족 캠프'는 실로암 복지관을 대표하는 간판 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다.
현재 국내에는 15개의 시각장애인 복지관이 존재하는데 서울이 가장 그 수가 많다.
그중 '서울시립노원시각장애인 복지관'은 1990년 12월 11일 개관하여 활동하던 중 2010년 5월부터 '행복을 들려주는 도서관'을 개관하여 대표적인 노원 시각장애인 복지관 사업이 되었다.
이는 sk텔레콤과 사단법인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가 공동제작한 '시각장애인 전용 음성 콘텐츠 서비스'인데
시각장애인 44만여 명이 이용하는 이 도서관은 53,276건의 콘텐츠를 보유하고 있다.
나의 남편도 자주 이용하는 프로그램 중 하나다.
또 다른 복지관 중 하나는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월평동에 위치한 '제주시각장애인 복지관'이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당시 서울 맹아 학교와 학생들이 제주로 피난을 오게 되면서 제주 시각장애인의 역사가 시작되었으며 중도실명인이 증가하자 복지관 개관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어 건립된 곳이다.
지역 특성상 제주 지역을 벗어나야만 위에서 나열한 프로그램을 이용할 수 있었으니 시간과 경비에 상당한 부담감을 느낄 수밖에 없을 뿐만 아니라 지리적 한계에 부딪혀 갇힌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그들이었다.
결국 2002년 3월 5일 사회복지 법인 '삼다'의 허가를 받아 2003년 10월 31일 제주 시각장애인을 위한 복지관이 개관된 것이다.
안마실, 치료실, 이. 미용실, 언어, 심리 치료실과 재활실 등의 각종 서비스를 제공하며 주간 보호 시설을 갖추고 있는데 시각장애인, 시각중복장애인만 이용할 수 있는 여타의 복지관과 달리 장애인의 가족 및 지역 주민, 기초 생활 보장 수급자가 이용 대상자인 것이 다른 복지관과 차별된다.
이렇듯 시각장애인 생활에 전반적인 도움을 주는 시각장애인 복지관이 존재하지만 치명적인 단점이라면 기동성이 부족한 시각장애인이 원근각처에서 자주 이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집 앞 슈퍼 가는 것도 힘든 시각장애인이 활동지원사 또는 복지콜의 도움이 있더라도 복지관을 자주 이용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근거리에 거주하거나 저시력인, 시간적 제약이 많이 없는 이들에겐 너무나 좋은 시설이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시간을 내어 이용하는 데 어려움이 많은 것은 어쩔 수 없는 단점이다.
이러한 어려움을 보완하는 성격을 띤 단체가 한국시각장애인지부 소속인 각 지역 '시각장애인 지회'라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복지관처럼 체계적이고, 규모 있는 사업을 할 수는 없지만 각 지역의 지회 사정에 따라 친목과 쉼터 역할을 하며, 몇 가지의 동아리 프로그램을 이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십년전 우리가 거주하던 양천구 내 '시각장애인 양천구 지회'가 없어질 위기에 처한 것을 나의 남편이 재구성하였다.
구 내에 거주하는 친한 지인에게 부탁하여 필요한 조직 구성을 만들고, 양천구에 거주하는 시각장애인을 일일이 수소문하여 지회원을 모집한 것이다.
지회 개설을 재추진한 남편은 지회장 후보 등록을 받아 서울지부에 등록하고, 선거를 통해 남편이 선출되었다.
지회 발대식을 위해 양천구청 강당의 한 장소를 대관하고, 나는 발대식에 오게 될 사람들에게 줄 선물과 간식을 구매하고 포장을 한다.
우리를 도와줄 이가 만만치 않기에 활동지원사 없이 혼자 움직이는 시각장애인을 일일이 모셔오고, 접수도 받고, 당장 중요 사항이 생기면 행사를 이끄는 남편에게 달려가 귓속말로 전달하고, 발대식 이후 회원의 행정적 정리 등을 하며 남편을 돕는다.
그러나 사는 게 뭔지....
딱히 급여가 없는 지회장 업무이다 보니 아이들 네 명을 먹여 살려야 하는 가장으로서 두 가지 업무를 병행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지회원의 쉼터인 지회 사무실을 따로 구하고 상주할 직원을 구하기가 힘들어 우리가 운영하는 안마원에 작은 간판을 걸어 이용하는 것이 전부였기에 지회원에게 미안한 마음이 항상 내재되어 있었다.
지부 차원에서 열리는 연합 체육대회에 참가해서도 회장인 남편이 솔선해야 해서 혼자 계주, 줄넘기, 줄다리기 등 거의 모든 종목에 출전하고는 다음날 일을 하기 힘들 만큼 힘든 날도 있었고, 지회원을 대상으로 1박 2일 강원도 여행을 기획했으나 나 또한 남편을 도와 참가해야 했기에 아이들을 봐줄 사람이 없어 체험학습 신청서를 내고 아이들 모두를 데리고 갔던 기억도 있다.
결국,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하며 경제적으로든 시간적으로든 여유가 있는 지회원 중 몇 분에게 부탁해 선거를 실시하고, 대신 이후 지회장이 일을 하는 데 있어 행정적인 부분이나 사업에 대한 도움을 주기로 했다.
지금은 구청 도움을 통해 번듯한 사무실도 생겼고, 회장 및 근로자의 급여를 보장받았다. 구청에서 지원하는 사무실을 구할 때도 남편이 직접 이곳저곳 함께 다니며 도움을 주기도 했다.
지회원을 위한 여러 프로그램이 구성되고, 기부도 받으며 제자리를 잡아가는 지회를 보면 아쉬움도 뿌듯함도 함께 한다.
시각장애인인 남편이 누구보다 그들의 욕구와 처지를 알기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기관을 만들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던 현실 앞에 안타까운 마음이 많이 남았다.
복지관 이야기를 하다 지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어쨌든 시각장애인도 행복을 추구하며 살 권리가 있으며 그들을 돕고자 생겨난 조직들중 하나의 형태에 대해 소개 해 보았다.
혹시라도 중도 실명자가 된 이웃이 있다면 지금까지 여러 글을 통해 소개 해 왔던 맹인 교회와 시각장애인 복지관, 지회 등을 소개 해 주는 것도 그들을 실질적으로 돕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다른이와 자신을 이해하고, 서로 의지하며 새로운 삶의 방법을 배우면서 작은 희망의 싹이 돋아나는 것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오늘은 남편이 실로암 시각장애인 복지관에서 섹소폰 수업을 받기로 한 첫 날이다.
일 하는 중에도 어찌저찌 일주일의 하루 중 시간을 내어 새로운 취미 생활을 해 보기로 한 것이다.
이처럼 그들에게도 비장애인과 같이 여러가지 삶의 욕구가 있고, 그들을 돕는 이러한 기관들이 보다 나은 삶을 살도록 동행 해 주니 그나마의 힘을 내어 살아갈 용기를 얻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