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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야 Jul 09. 2023

一生一必死, 六命의 아우성

연극 《육쌍둥이》리뷰



* 본 리뷰에는 연극 《육쌍둥이》의 전체 줄거리와 결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 번 태어나는 것은 정해지지 않았으나, 태어난 후에는 반드시 죽는다.
한날한시에 태어난 여섯 목숨이 무대에 오른다.


무대 위 한 여자와 남자. 공연은 아직 시작 전이다. 추적이며 내리는 비와 머리를 부스스하게 풀어 헤친 여성의 춤사위가 기묘하다. 다른 한쪽에는 초점을 허공에 둔 채 손에 든 아이스크림을 빠는 붉은 머리. 몸은 어른이지만 어딘지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다. 성인 배우가 아이 역할을 하는 건가. 궁금해하며 객석에 앉으니 마침 공연이 시작된다. 빗소리를 뚫고 들려오는 여자의 목소리. “안녕하세요”. 관객, 마주 인사한다. 여자는 육쌍둥이 이야기를 시작한다. 아니, 들려주겠다고 한다. 여자가 자기 목소리를 온전히 내는 시간은 공연의 시작과 끝. 그 외에는 소리 없는 쌍둥이들의 엄마 ‘여인’이다.


응애, 응애, 응애. 여인의 소개에 맞춰 쌍둥이들이 등장한다. 아이가 차례로 산도를 통과하듯 객석에서 무대로 여섯, 아니 다섯 명의 쌍둥이가 줄지어 걸어 나온다. 기저귀 모양 의상 아래로 드러낸 맨다리. 스무 살이나 먹었다는 이들은, 여전히 태어난 당시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심상하지는 않은 분장에 관객을 압도하는 분위기. 여인의 방백으로 조용하던 무대가 일순간 시끌시끌해진다. 일찍이 무대에 나와 객석을 보며 아이스크림을 빨던 붉은 머리 조진내, 그리고 공연의 시작과 함께 본가인 무대로 돌아온 다섯 명. 함화자, 이기라, 최고야, 신기해, 박수처. 성도 이름도 생김도 제각각인 여섯쌍둥이가 한자리에 모인다. 최초에 그들이 한배에서 나왔던 것처럼.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열 살 무렵 시작된 가출과 입양으로 십여 년을 떨어져 지낸 쌍둥이들은 스무 살이 되어 한목소리로 외친다. “왔어. 왔어. 우리 왔어. 아비 죽고 우리 왔어”. 따로 잘 살다 어쩌자고 이렇게 모였을까. 하지만 일단 오긴 했으니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한다. 어딘가 불안하지만 가벼운 발언. 아비가 죽고 우리가 왔다. 이 조진내 가득한 집구석으로.



1. 一生, 하나였던 목숨이     


비슷한 얼굴과 몸, 신체적 조건. ‘쌍둥이’라는 말에서 흔히 떠오르는 이미지다. 하나의 세포에서 갈라져 나온 일란성 쌍둥이의 유사성은 특별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한날한시에 태어나서인지 그들은 종종 신기함 내지는 실험 정신이 어린 사람들의 시선을 견뎌내곤 했다. 과학과 기술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았던 과거에는 쌍둥이의 정신에 관한 일종의 미신적이고도 운명론적인 믿음이 있었으며, 다종다양한 환상 소설에서는 최근까지 텔레파시 등의 비범한 능력을 지닌 쌍둥이가 등장하지 않았는가. 그들이 서로에게 독심에 가까운 능력을 쓸 수 있다는 상상은 곧잘 현대 창작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쌍둥이는 마치 서로의 삶을 일정 부분 공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보통의 쌍둥이들은 그렇다.     


아니, 근데 이렇게 이름도, 생김도, 성격도 뭐 하나 같은 곳 없는 아이들도 쌍둥이라고 볼 수 있을까.     


《육쌍둥이》의 인물들은 평범한 쌍둥이가 아니다. 굳이 쌍둥이가 아닌 개인으로 보더라도 무척 특별하다. 길 가다 지나치면 괜히 다시 돌아봐야 할 것 같은 그들. 공통점의 최소화를 의도한 것처럼 여섯 명의 성격, 의상, 분장은 제각각이다. 자라온 환경 역시 전혀 다르다. 부잣집에 입양 간 신기해의 고상함과 무대에서 술주정을 멈추지 않는 박수처의 괄괄함. 돕는 손길을 끊임없이 필요로 했을 조진내와 세상 모든 걸 홀로 깨달은 듯한 최고야. 아이돌을 꿈꾸는 자장면 가게의 이기라와 가장 화려한 의자를 꾸며온 함화자. 어디 한구석이 붉은 것 말고 공통점이 하나 없다. 그들은 한 자리에 모인 것이 어색하기만 하다.     


죽지도 않고 우리가 이렇게 다시 모인 게 어디냐. 그들은 어딘가 삐걱거리고 불안하지만, 오래 떨어져 있던 형제라면 으레 나눌 법한 평균적인 대화를 애써 이어간다. 가족으로서 그들의 유대는 한없이 불안하다. 아슬아슬하고 희미하다. 그들은 별것 아닌 대화를 나눈다. 불우했던 어린 시절로부터 제 살길을 찾기 위해 도망치거나 부모에 의해 강제로 집을 떠난 아이들. 폭력적이었던 아비와 그를 견디던 날들. 집에서 벗어난 후로 살아간 이야기.


이런 시시콜콜한 대화의 사이, 무대에는 조진내와 여인의 곡소리가 울린다. 여인이 선창하면 조진내가 후창. “아이고, 아, 버, 지!” 무심하게 뚝뚝 끊기는 조진내의 외침은 인물 정보가 전혀 없는 도입에서 단순히 그의 캐릭터로 여겨진다. 여인의 곡소리 역시 마찬가지다. 아버지의 죽음보다 오랜만에 만난 서로가 더 신기하고 궁금한 다섯 형제의 대화 사이, 여인과 조진내는 멈추지 않고 외친다. 아이고 아버지! 아비의 죽음을 알리는 것은 오직 껍데기뿐인 곡소리뿐이다.     


십 년만에 모인 쌍둥이의 앞에 하나의 과제가 닥친다. 모든 부모의 사망 이후에는 자식들에게 민감하지만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대화거리가 생긴다. 바로 재산 분배의 문제다. 하지만 육쌍둥이에게는 꽤나 간단한 문제다. 아니나 다를까, 예상했던 대로 자식들에게 아비가 남긴 재산은 없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밝혀지는 흥미로운 사실. 여인이 그들의 어머니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기라는 아버지의 재산을 알아보던 중 여인에 관한 독특한 단서를 발견한다. 그러고 보니 여인은 극의 시작부터 쌍둥이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고물상 주인이 데려다 기른 고아들이기 때문일까. 아이들을 사랑으로 돌볼 수 없는 여인의 심적 상황을 고려할 때, 아이들과의 유대가 형성되지 않았음은 이해가 된다. 그러나, 여인은 기이한 안광을 빛내며 집 안을 돌아다닐 뿐 그들과 어떤 유의미한 대화도 나누지 않는다. 어머니로서 최소한의 관심도 쌍둥이들에게 보이지 않는다. 결정적으로 여인은 아이들과 주민등록상 열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여인의 정체가 불분명해짐으로써 이 극의 장르는 한순간 추리의 영역이 되지만 그것도 잠시, 쌍둥이들은 아비의 장례를 서로에게 떠넘긴다. 불편하고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을 누가 맡을 것인가. 어차피 제각각 살아온 인생. 그들은 서로에게 장례 절차를 미룬다. 결국 상조회사에 ‘기본 옵션’으로 아버지의 장례를 맡기는 함화자. 서로 눈치를 자리를 뜨려는 그때 조진내의 곡소리가 울린다. 아이고, 아. 버. 지. 그의 손에는 문서가 하나 쥐여 있다. 고물밖에 안 줍던 아빠. 재산을 남길 거라고 기대도 하지 않았던, 그가 아무도 삶의 선택지에 넣지도 않았 ‘대박’을 남기고 죽었다. 한두 푼이 아니다. 로또나 당첨되어야 만져볼까 싶은 금액이 하늘에서, 아니 조진내의 손에서, 아니 죽은 아비에게서 뚝 떨어진다.     


이 문서로부터 극의 방향은 급전환된다. 아비의 땅이 노다지가 된다. 의례적으로 얼굴만 보고 헤어지려던 여섯 개의 인생이 다시 한 방향으로 질주한다. 그들의 앞에 떨어진 커다란 돈. 살면서 만져볼 수 있으리라 생각조차 안 했을 그 돈. 무대에서 존재감이 없던 여인과 막내는 순식간에 돈을 불려주는 수단이 된다. 그 둘을 부양한다는 명분으로 돈을 더 받으려는 쌍둥이들. 재산 분배 문제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그들의 얼굴에 그려진 욕망. 붉은빛이 영역을 넓혀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 전에, 입을 닫고 있던 조진내가 느린 말을 시작한다. 잠시 무대가 빈 사이. 유일하게 아비의 죽음을 지켜본 쌍둥이 조진내의 방백이 객석으로 향한다.


아비는 어떻게 죽은 것인가.



2. 내 안의 불     


재개발로 인해 경찰과 대치하던 시민들이 화재로 목숨을 잃었다. 고물 장수였던 쌍둥이들의 아비는 이 현장에서 경찰과 대치하던 사람들을 끌어내는 일을 했다. 철거 고물을 주겠다던 말에 홀랑 넘어간 아비. 그러나 사고로 사람들이 죽자 고물을 받지 못한다. 조진내의 회상에서 관객은 용산참사를 떠올린다. 홍시처럼 빨간 아빠의 몸을 조진내는 뜨겁게 토해내듯 기억한다. 아비는 돈에 양심을 팔고 철거민들을 끌어내려 했던 가해자였다. 또한 가정 안에서 아이들을 내쫓고 입양 보낸 장본인이다. 두 번의 방백으로 조진내는 그런 아비를 죽인 게 다름 아닌 자신임을 진술한다. 관객은 딜레마에 빠진다. 철거 고물을 받기로 하고 철거민을 끌어내기로 했던 쌍둥이들의 아비. 가정폭력 가해자였던 그를 죽인 조진내는 선인인가 악인인가.


그 힌트는 조진내의 발화에 있다. 그는 아버지의 죽음을 생생히 기억한다. 아버지의 몸에 있던 ‘불’이 자신에게 옮겨왔으며, 그 ‘나쁜 불’을 꺼달라고 한다. 이 극에서 아비에게 내어주는 동정은 없다. 그는 철저히 나쁜 사람이며, 오히려 더 어려운 상황의 사람들을 이용해 자신의 배를 불리려 했다. 가난을 모면하고자 더 가난한 이들을 이용했고,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다. 아이들의 ‘왕’으로 군림하려 했던 그의 말로는 처참하다. 조진내는 아비로부터 시작된 탐욕의 불이 자신에게 옮겨 왔다고 한다. 결국 그는 불을 이기지 못하고 돈으로 달려들던 형제들까지 죽인다. 이미 예정된 일이었다.


용산참사의 ‘불’로 집약되는 《육쌍둥이》의 지배적인 이미지는 ‘붉은색’이다. 하지만 이 빨강은 ‘참사’의 불과 인물의 면면에 찍힌 붉은 분장 때문만은 아니다. 여섯쌍둥이는 ‘신생아’라는 이미지에서 출발하고 ‘불’을 통과해 ‘피’로 끝나는 인생을 산다. 그들의 삶 전체가 빨강이다. 인간은 갓 태어났을 때 가장 붉다. 쌍둥이들에게 기억은 없을 테지만, 그들은 서로의 몸이 가장 빨갈 때, 한 공간에 있었다. ‘신생아의 몸’을 상징하는 빨강은 이들이 운명적으로 하나의 공동체임을 틈틈이 상기시킨다. 그들은 언젠가 한 번은 모이게 되어 있었다. 가족과 형제라는 이름으로 하나의 산도를 빠져나왔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에 형제애가 바랜 여섯 인간을 단숨에 고향으로 집합시킨 건 이 기묘한 운명이었다.     


아버지의 재산이 밝혀진 후 여섯쌍둥이의 마음에는 불이 피어올랐다. 얼굴의 붉은 분장이 크게 번지고, 더 큰 돈을 차지하기 위해 여인과 조진내를 데려다 돌보겠다는 겉바른 말도 쉽게 오간다. 아슬아슬하게 붙여둔 형제와 우애, 쌍둥이로서의 동일성이 부서지는 순간이다. 이 순간 여섯 명은 순식간에 개인이 된다. 그저 빨간 분장으로만 보이던 것들이 몸피를 키운다. 관객은 드디어 그 의미를 깨닫는다. 그건 마치 불꽃 같다. 선명한 욕망이다. 여섯 명의 몸과 정신을 먹고 자라는 불. 오직 조진내에게서만 불은 번지지 않는다. 그는 이미 마음을 집어삼킨, 더 번질 수 없는 불꽃을 가지고 있다.     


조진내는 극의 진행 내내 몸과 행동으로만 자신을 표현한다.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이따금 다섯 형제의 움직임에 따라 돌아다닌다. 무대에서 주목되는 건 그가 아닌 다섯 쌍둥이의 대사와 모습이다. 파격적인 분장을 한 그들에 비해 조진내의 옷차림은 밋밋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 모든 평범함을 전복하듯, 조진내는 이야기에서 발생하는 두 번의 분기점을 여인과 함께 설계한다. 그의 방백이 이 절정의 꼭대기에 있다. 여인의 요청에 따라 형제들을 집으로 끌어들이고 그들에게 유산의 존재를 알리고, 끝내 죽이는 건 모두 그다. 스윽, 스윽, 다섯 번을 내리긋는 칼 소리와 여인이 조진내를 찌르는 단 한 번의 몸짓. 객석에는 적막이 찾아든다.     


관객은 극의 시작 전, 무대에 몸짓으로 움직이는 여인과 조진내가 있었다는 것을 상기한다. 공연의 내용을 모르는 관객들에게 단지 신선한 퍼포먼스로 보였을 움직임의 의미가 결말에서 짜 맞춰진다. 그 둘은 다섯 명의 쌍둥이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한 배에서 태어난 그들이 갈기갈기 분열되고, 끝내는 죽으리라는 걸 가장 잘 알았을 여인은 섬뜩하게 행복한 춤을 춘다. 고물상 주인의 집에 처음 들어와 살 때부터 여인은 살기 위해 미친 척해야 했다. 여인의 정신은 처음과 끝뿐 아니라 극 전체에서 날카로울 정도로 또렷했다. 조진내는 욕망으로 가득한 내면을 다스리기 위해 아이스크림을 빨고 있었지만, 끝내 나쁜 불을 끄는 데에 실패한다. 여인이 조진내를 살해함으로써 ‘나쁜 불’은 강제로 소멸한다.


인트로에서 여인과 조진내의 퍼포먼스를 지배했던 건 차가운 물의 이미지다.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조진내가 물고 있는 아이스크림은 거의 얼음에 가깝다. 100분가량 이어지는 공연 내내 버텨야 한다는 실용적인 면을 고려한 오브제겠지만, 아이스크림보다는 막대기를 꽂은 얼음처럼 생겨서인지 더 단단하고 차가워 보인다. 뜨거운 불에 상극인 물과 얼음의 이미지가 공연 시작 전의 온도를 한껏 낮추는 것에 비해 결말은 견디기 힘들 정도로 뜨겁다. 욕망의 불꽃이 절정에 이른 여섯 아이를 죽이고 집에 불을 지른 여인은 꽃불처럼 오그라들며 극의 종료를 알린다.          



3. 必死, 널브러진 몸     


‘어디서 이상한 냄새 안 나?’ 신기해가 맡았던 냄새는 일평생 고물만 주운 아버지의 퀴퀴한 냄새가 아니었을지 모른다. 어쩌면 이미 죽을 예정이던 그들, 한때는 가족이었을, 운명처럼 형제로 태어난 그들을 남김없이 태울 불꽃의 매캐한 향이었을지도. 박수처의 이상 행동도 이해가 간다. 그는 점점 분열되고 있는, 끝장을 향해 달려가는 형제들을 웃음으로 하나 되게 하고 싶었다. 신기해는 그저 고상할 줄만 알고 사리 분별을 잘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인물이었지만, 불편해져 가는 분위기를 예리하게 감지했다. 박수처는 알코올 중독에 되는 대로 말을 뱉는 것 같았지만, 형제들이 이미 파국으로 내달리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어느 한 사람이 주인공이 아닌 모두가 코러스로서 100분 동안 보편적인 욕망을 이야기한다. 이런 극에 주인공이 없음은 새삼 두렵다. 타오르는 불꽃이 한 사람에게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있음을 헤집어 보여주는 공연이 아닌가. 왔어, 왔어, 우리 왔어, 아비 죽고 우리 왔어. 아버지와 애써 선을 긋던 쌍둥이들도 결국 그와 똑같다. 그들도 역시 아비와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죽는다. 한 근에 얼마, 라는 식의 고물상 계산법까지는 아니더라도 양팔 저울에 노다지 땅과 함께 올렸을 때, 그들은 한없이 가볍지 않았던가. ‘우린 형제잖아’라는 말이 이리도 무색해질 수가 있단 말인가.     


무대에 충격적일 정도로 힘없이 누워 있던 육쌍둥이를 떠올린다. 시끄럽고 괄괄하게 뛰어다니던 그들이 온몸의 힘을 뺀 채 차게 식어 있다. 이렇게 비극적인 죽음이라니.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육신이라니. 불과 몇 분 전까지 인생 한번 펴 보겠다고 눈을 부라리고 날뛰던 이들이 숨소리도 내지 않는다. 적막, 불의 소리, 타오르는 여인의 몸짓, 그리고 암전.


공연 내내 참았던 숨을 단번에 토해 보았다. 신나고, 기괴하고, 조금 어처구니도 없다가 갑자기 스릴이 넘치고, 범인을 찾는 동시에 끝나는 이 괴이한 극에서 관객으로서의 나는 무엇을 남겨야 할까. 나와 남의 불꽃을 발견하는 감각. 욕망에 삼켜지지 않기 위한 균형. 물과 같은 사람들을 주변에 두는 일. 언제든 뜨거운 마음에 차가운 마음을 접속할 수 있는 기민함. 세상이 불타지 않도록 막는 건 힘들지만, 우리 마을이 타지는 않도록 근처를 돌보는 일. 이 모든 걸 놓치지 않는 게 쉬울까, 아니 가능은 할까 생각하면서 공연장을 나왔다.


우선 내 몸을 살핀다. 어딘가 작고 붉은 반점이 있지는 않을지 궁금해 하면서.

 



관객과의 대화에서 공연 시작 전, 어떤 생각을 하며 무대의 퍼포먼스를 진행하느냐는 관객의 질문에 조은아 배우는 “관객 한 분 한 분이 빗방울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답했다. 여인에게, 조진내에게, 그리고 나머지 다섯 명의 쌍둥이에게 필요했던 건 그들의 손에 억지로 쥐어진, 시간이 지나면 녹아 사라지는 아이스크림이 아니다. 하나하나의 빗방울. 그들을 진심으로 감싸 안아주는 마음의 물방울들이다. 하늘에서 온종일 추적거리던 비도, 다섯쌍둥이가 조진내를 안았을 때도 불은 활활 타오르기만 했다. 마음의 근본적인 욕망이 다스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음의 불은 마음의 물로만 끌 수 있다. 안타깝게도 그 불을 끄지 못했던 사람들의 인생이 무대에서 타오르는 것을 보며, 내 마음의 표면에도 조금씩 물을 흘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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