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크
신촌 A대학교 정문 건너편 한 카페, 내가 시험기간마다 밤새 공부하던 곳이다. 강의실에서도 교수님의 주목을 받기 싫어 구석자리를 선호하던 나는 이 곳에서도 항상 구석이었다. 요즘 같은 팬데믹 시대엔 더더욱 구석에 박혀 있고 싶다. 주위엔 마스크를 끼지 않고 침을 튀기며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천지인데다 창문 밖엔 착용 의무가 해제된 지 2주가 넘어 슬슬 마스크를 벗고 다니는 사람들이 눈에 많이 들어왔다. 현재 거리두기가 완화됐다고 해도 적어도 사람간 사이 2미터 안쪽이면 마스크를 쓰고 있어야 되는 것 아닌가? 기껏해야 내 자리와 옆 자리 사이 거리는 1미터가 조금 넘을 뿐인데 그들은 내가 보이기라도 하지 않는듯 버젓이 마스크를 벗고 있다. 이 사람들은 마스크를 쓴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거지?
몇 분 뒤, 그녀가 계단으로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약속시간이 지난 몇 시간이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는 지각이었다. 그 몇 시간 동안 구석에 앉아 답답하지만서도 마스크 속에서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한 채 내가 해야 될 말들을 연습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연습했던 시간이 무색하게 그녀는 자리에 앉자마자 헤어지자고 했다. 왜? 나 더 이상 너 못 믿겠어. 나는 당장 마스크를 벗었지만, 그녀는 벗지 않았다. 그녀와 나 사이 거리 1미터도 안 되는 거리였다.
불과 이틀 전 일이었다. 취업 준비로 창문 하나로만 호흡하는 원룸과 카페만 왕복하고 있는 나에게 고등학교 친구가 오랜만에 술이나 한 잔 한자고 연락이 왔다. 여자친구에게 둘이서만 술을 마시겠다고 연락을 한 후 나간 자리엔 친구와 그와 친한 여사친도 와있었다. 워낙 예상치도 못한 상황이었던지라 여자친구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못했다. 왜 왔는지도 모른 그녀와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며 자리에 앉고, 마스크를 사이에 두고 술잔을 기울일 때만 마스크를 벗었다 꼈다를 반복했다. 그러다 여러 번의 술잔이 오가고 취기가 오를 대로 오른 상태에서 자리의 어색함과 불신은 눈 녹듯 사라지고 우린 다정하게 어깨동무를 하고 셀카를 찍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자유로운 분위기에 취해 나의 SNS에 그 셀카를 올린 것이 불신의 원천이었다. 셀카 속 테이블엔 술병 6개와 먹다만 안주, 그리고 벗겨진 마스크 세 개가 놓여있었다. 그들과 나 사이 거리 1미터도 안 되는 거리였다.
나를 뒤로 한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는 그녀의 등만 바라보며 벗었던 마스크를 다시 쓸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등에 비춰진 스포트라이느가 점점 넓혀지면서 다시 주변 사람들이 보였다. 내 앞자리, 옆자리, 대각선, 심지어 창문 밖의 사람들은 여전히 마스크를 쓰고 있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어느 누구보다 나에게서 가장 먼 그녀만이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마스크를 쓸지 말지가 더 이상 물리적 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나는 카페를 나와 터벅터벅 골목으로 들어가 주머니 속 담배를 꺼냈다. 마스크를 벗고 담배를 입에 문 채로 불을 피우려는 순간 학부 시절 내가 싫어했던 과 동기와 눈이 마주쳤다. 내가 교수와 친하게 지내 성적을 받나낸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려 나의 대학 생활을 망치게 한 놈이었다. 나의 오른손은 오랜만에 반갑다고 악수를 청하는 그의 오른손을 잡고 있었지만, 나의 왼손은 마스크를 올리고 있었다. 그와 나 사이 거리 자그마치 1미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