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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리에 Jun 03. 2023

슬럼프? 일단 써!

웹소설 작가의 슬럼프와 번아웃, 대환장 콜라보

조급하게 굴지 말고 천천히 차기작을 기획해 봐야지.


그 생각은 진심이었다. 다만 시기가 따라주지 않았다. 서두르지 않겠다는 마음을 먹고 겨우 소재 하나를 떠올렸을 무렵, 계약되어 있는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다. 플랫폼과의 미팅이 예정되어 있으니 기획안을 가진 게 있으면 달라는 요청이었다.


시간이 촉박했다. 그래도 서두르지는 않았다. 소재만 간신히 떠올렸다고 솔직하게 얘기했고, 아주 큰 틀과 캐릭터 소개만 적은 기획안을 전달했다. 줄거리의 기승전결을 포함한 시놉시스는 적어도 2주 정도 고민하면서 완성해볼 계획이었다.


그런데 간결히 적어 보낸 기획안이 생각지 못한 희소식을 들고 왔다. 플랫폼 측에서 연재 심사를 넣어보라고 했단다.


그 무렵 플랫폼 정식 연재는 상당히 귀한 기회로 여겨졌다. 연재 경험이 없는 작가의 경우에는 무료 연재 사이트에서 인기 순위 상위를 차지해야만 유료 연재 심사를 넣어볼 수가 있었는데, 20화 초과로 공개가 되면 안 된다는 암묵적인 룰도 있었다. 그러니까, 20화만에 일정 수치 이상의 인기를 얻어야만 유료 연재의 문턱까지 갈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유료 연재를 노린 많은 작가들이 20화까지만 무료 연재를 하는 일이 많았다. 만족스러운 성적이 안 나오면 다른 소재로, 혹은 설정이나 내용을 손봐 일명 '리메이크'로 다시 20화까지 무료 연재하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20화만에 엎고 다시 쓰고를 반복하면서까지 유료 연재를 노리는 이유는 다양할 테다. 하지만 아무래도 금전적인 메리트가 크게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정식적으로 연재를 하면 선인세를 최소 얼마부터 준다더라 - 하는 금액이 꽤 컸기 때문이다. 인기 작가는 단행본만으로도 큰 단위의 선인세를 받겠지만, 그렇지 않은 작가들의 사정은 다르지 않던가. 출판사에서 단행본 계약으로 받을 수 있는 선인세와 플랫폼에서 연재로 받는 선인세는 단위부터가 달랐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기획안이 물고 온 심사 제안은 희소식이 분명했다. 단, 날벼락도 함께였다. 내 계획으로는 최소 2주, 또는 그 이상의 기간동안 스토리를 짜려고 했는데. 2주 안에 시놉시스와 심사고를 모두 써야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때는 그 제안을 거절할 만한 배포도 없었다. 플랫폼에서 먼저 제안해줬다는데 그걸 감히 내가? 어림도 없었다. 거기다가 한참 글을 못 쓰고 있어 뭐라도 해야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던 터라 재고는 해볼 생각도 못 했다.


고로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이틀만에 시놉시스를 완성했고, 당장 초고 집필에 들어갔다. 에너지 드링크를 쌓아놓고 마시면서 작업했으나 잘 풀릴 리가 없었다. 급하게 만든 캐릭터, 마찬가지로 급히 짠 스토리. 내 역량 부족이겠지만, 나 자신조차 내가 만든 이야기를 확실하게 알지 못했다. 쓰는 사람이 잘 모르는 이야기가 글로 잘 나올 리가.


시간이 촉박한 와중에도 몇 번을 엎고 다시 쓰기를 반복했다. 내 스스로 문제점을 느껴서 다시 쓸 때도 있었지만, 중간중간 출판사의 피드백에 따라 처음부터 다시 써야하는 상황이 오기도 했다. 그러잖아도 촉박한 시간은 점점 줄어들지, 써놓은 내용은 0으로 돌아가기 부지기수지. 정말 그때의 압박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때 깨달았다. 나는 촉박한 상태에서는 뭔가가 안 되는 사람이구나.


수정을 반복할 때마다 마음은 더 조급해지기만 했다. 조마조마하더라도 끝내 만족할 만한 결과물을 보냈다면 좋았을 텐데. 심사를 넣기 직전까지 수정을 했는데도 퍽 성에 안 차는 결과물이 나왔다. 하지만 더 손을 볼 시간이 없어 보내야만 했다.


그렇게 겨우 심사고를 보내놓고 나자 눈물이 터졌다. 에너지드링크를 들이부어가며 고치고 또 고쳤는데도 결국 마음에 들지 않는, 심지어 엉망인 원고를 보낸 사실이 너무도 비통했다. 울고 싶단 생각을 하지도 않았는데도 원고를 보낸 순간 눈물부터 터졌다. 그러고 한 이틀은 시시때때로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더랬다.


그래도 그 난리를 친 보람이 있었다고 해야 할까. 엉망이었던 원고는 심사를 통과했다. 덕분에 소문의 선인세도 받았다.


하지만 문제는 계속됐다. 어영부영 시작하게 된 작품은 쓰는 내내 어영부영이었다. 연재 런칭일을 기다리며 원고 작업을 하는 동안 몇 번을 엎었다가 다시 썼고, 런칭일에 다다라서는 심사고때 써놓았던 앞부분과 톤이 맞지 않아 또 다시 수정을 거쳐야 했다.


그나마 런칭일을 앞두고 수정을 하는 건 양반이었다. 런칭 이후에는 매주 마감일이 정해져 있어 늘 전쟁이었다. 시간이 촉박하면 하던 것도 못 하는 나에게 매주의 마감은 엄청난 압박이 아닐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의 작업은 최악이었다. 충분히 머릿속으로 굴려보지도 못하고 시작한 작품이라 확신이 없었다. 내가 확신이 없으니 돌아오는 피드백에도 쉽게 휘둘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확실하게 세운 기준이 있다면 그에 따라 피드백을 유연하게 받아들이고 적용할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하질 못했다. 원고 교정 과정에서 어떠한 피드백이 돌아오면, 시간도 없고 내가 확실하게 가진 의견도 없어서 그냥 막 받아들였다.


당연히 부작용이 있었다. A가 낫지 않아요? 하길래 A라고 무작정 고쳤는데, 그러고 나니 A로 인해 파생되어야 할 내용을 이어나가질 못하는 것이다.


당연했다. 내 머리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게 아니니까. 하다못해 의견을 듣고 어떻게 활용하면 좋겠다는 계획도 없이 무지성으로 받아들인 피드백이라 이후에 발생하는 문제들이 많았다. 그러면 그 문제를 직면하고 어떻게든 수습하느라 머리를 쥐어 짜고, 있는 힘껏 쥐어 짜서 더 이상 나오는 게 없으니까 또 바보가 됐다.


슬럼프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상태로, 써야하니까 쓰는 글을, 시간에 쫓기기까지 하며 쓰는 작업은 정말이지 쉽지 않았다. 집필하는 내내 숨은 턱턱 막히고, 머리가 부드럽게 굴러간다는 느낌은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까지 힘들어하면서 썼는데….


성적은 폭망이었다. 대폭망.


사실 예상은 했다. 쓰는 내내 손에 붙지 않고 뒤엎는 수준의 수정을 반복하며 힘들게 썼으니까. 잘 된 작품은 내가 편하게, 그리고 쉽게 썼었기 때문에 그때와는 확연히 다르다는 느낌을 미리 받았었다. 그렇기에 딱히 기대랄 것도 안 했건만, 그 낮은 기대보다도 더 망했다.


하지만 작품이 공개되고, 성적이 좋지 않다고 실망하거나 울적해할 시간도 없었다. 남은 마감을 쳐내느라 바빴다.


그리고 마른 수건을 쥐어 짜고 비틀고 난리부르스를 추며 겨우 완결을 냈을 때, 번아웃이 찾아왔다.

이겨내지 못한 슬럼프 위로 번아웃이 겹쳐지는 대 참사가 벌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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