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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리에 Jun 06. 2023

새 키보드를 사 보았다

멘탈 터진 웹소설 작가의 발버둥2

외전 집필에 교정, 출간까지 다 마치고 나서는 또 한동안을 쉬었다.


사실 그 무렵에는 이미 시놉시스 하나가 나와 있어서 글을 시작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게 되질 않았다. 쓰고 싶은 마음도 있고, 써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좀처럼 시작이 되질 않았다. 써 봐야지, 하면서 컴퓨터 앞에 앉았다가도 멍하니 있다가 폰으로 딴짓을 하다가 결국에는 도로 컴퓨터를 끄기가 일쑤였다.


그나마 컴퓨를 켜기라도 하면 다행이었다. 써야지, 써야지 생각하면서도 그 앞에 앉는 것조차 못하고 폰게임이나 웹서핑을 하며 허송세월을 보내기 일쑤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도 새로 짠 시놉시스에 확신이 없었던 것 같다. 불현듯 떠오른 아이디어가 재미있을 것 같아 스토리를 짜보긴 했는데, 스토리로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길을 잘못 든 느낌이랄까. 그때도 묘하게 그 지점이 마음에 걸려서 쉽사리 시작을 못 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실제로 써보지는 않으면서 머릿속으로만 오만 생각을 했다. 시놉시스에는 A라고 적었지만 B로 써볼까? A인물을 B인물로 바꿔볼까? 머릿속으로만 이러저러한 수정사항을 수차례 굴려봤다. 그런 식으로 자꾸만 이렇게 저렇게 바꿔볼 생각만 하다 보니 쓸 엄두가 안 났는지도 모르겠다. 맘으로는 일단 써보고 고민을 하자! 하면서도 실행에 옮기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당연하게도 답답했다. 이미 차기작으로 정해놓은 시놉시스도 있건만 좀처럼 집필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쓰겠다는 의지가 있는데도 맘처럼 시작을 못하는 모순적인 상황이 유쾌할 리 없었다.


심지어 그때는 컴퓨터 앞에 앉는 것마저도 힘에 겨웠다. 전작의 저조한 성적과, 또 그런 성적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이번엔 정말 잘 돼야한다는 부담 혹은 압박감에 첫 문장 하나를 뽑아내기가 참 어려웠다.


무언가 새로운 자극이 필요했다. 핑계같지만, 핑계가 맞기도 하지만, 일단 컴퓨터 앞에 앉고 싶게 만드는 요소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을 쓰는 게 아니라 다른 흥미라도 북돋워서 글을 쓰는데까지 연계를 해보면 어떨까 하는 의도였다.


그 결과, 새로운 키보드를 샀다.


실제로 웹소설 작가들 중에는 키보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많다. 나 같은 경우에는 웹소설 작가 이전에도 타이핑을 많이 하는 일을 했었는데, 컴퓨터를 사면 기본으로 제공되는 키보드를 한참 사용하다가 손끝이 아프고 손가락 관절까지 아파오면서 키보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잠깐 다른 길로 새보자면, 손가락 마디마디에 파스를 붙이고 타이핑을 하다가 처음으로 무접점 키보드의 존재를 알게 됐다. 매일같이 키보드를 쳐야하는데 손이 아프니 선택권이 별로 없었다. 가성비가 좋다는 모델로 무접점 + 저압 키보드에 입문했고, 만족도는 최상이었다.


원래 장비라는 게 그렇지 않나. 돈을 쓰면 쓴 만큼 좋다. 처음 무접점의 세계에 빠져들고 나자 충분히 만족을 하고 있는데도 또 다른 데로 눈이 갔다.


그건 바로 키보드계의 명품이라는 리얼포스. 30만원 후반대의 가격이 적잖이 부담스러웠고, 물량이 적어 구매하기도 어려웠던 터라 관심을 두지 않고 있던 차였다. 우연히 판매 일정 공지를 보게 되어 혹한 마음에 구매를 시도해봤는데 웬걸. 정해진 시간에 새로고침을 하자마자 품절이 떴다.


살 운명이 아니었나보다 하고 쿨하게 포기하려 했다. 그때, 불쑥 다른 사이트에서도 판매를 한다는 사실이 뇌리를 스쳤다. 그리고 혹시나 하고 접속해본 타 사이트에는 남은 물량이 있었다. 높은 가격 때문에 결제를 할때까지도 망설였으나 '영 아닌 거 같으면 취소하면 되지' 하는 안일한 생각으로 결제를 하고 말았다.


후회는 이르게 찾아왔다. 당일 저녁에 바로 주문 취소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직접 고객센터에 전화를 해야만 취소할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때는 이미 고객센터 운영이 끝난 시각. 내일 아침에 전화를 걸어서 취소하기로 결심했으나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출고가 완료됐다는 문자를 받았다.


이번에는 살 운명이었나보다 하고 얌전히 물건을 받아봤다. 그리고 처음으로 타건감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느꼈다. 당시 나는 한창 연재작을 쓰고 있을 시기였는데, 글이 잘 풀리진 않지만 키보드를 두드려보고 싶은 마음에 뭐라도 쓰려고 했다. 그렇게 키보드를 바꾼 당일 세 편을 내리 쓰는 기적을 맛보았다. (그날 쓴 내용은 추후 완전히 갈아 엎었지만.)


사족이 길었으나 어쨌든, 그래서였다. 쓸 소재가 있는데도 시작을 못하고 있으니 새 키보드로 새 타건감에 취해 뭐라도 쓰고 싶은 설렘을 얻고 싶었다.


애석하게도 잘 통하지는 않았다. 언박싱을 할 때 신이 났고, 기존의 것과 다른 타건감을 느꼈을 때도 만족스러웠지만 작업을 쭉쭉 해내지는 못했다. 키보드를 두드리고 싶은 마음은 들었으나 그게 작업으로 승화되지는 못한 것이다. 신작을 시작하기는커녕 메모장에 'ㅓㅁ니ㅏ어민러ㅣㅏㄴ어리ㅏ아ㅣㅇ' 따위의 무작위 타이핑을 하면서 새 키보드의 타건음만 즐겼다.


뜻대로 차기작을 시작 못 해서 그렇지, 신작을 쓰고 싶은 마음만은 정말 간절했다. 새 키보드로도 효과를 보지 못했던 나는 끊임없이 고민했다. 그리고 고심 끝에 글을 쓰는 환경을 바꿔볼 결심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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