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이던 내가 소설을 읽기 시작한 것은 옆집 언니 때문이다. 언니는 그때 명문이던 S상고에 다니던 오빠가 빌려온 책을 몰래 갖다 주었다. 내가 소설을 읽고 책 내용을 모노드라마처럼 들려주면 언니는 연극 구경을 한 것 같다며 재미있어했다. 내가 읽었던 책은 탐정소설이나 연애 소설이었다. 셜록 홈스, 애거사 크리스티, 김래성의 소설, 철가면, 좁은 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전쟁과 평화, 심훈의 상록수, 통속적이라 폄하하던 방인근의 단편들, 여류 소설가 최정희의 장미의 집, 모윤숙의 시집까지 닥치는 대로 읽었다. 모두 어른들이 읽는 책이다.
빌려온 책을 빨리 읽고 티 안 나게 가져다 놓으려고 밤을 새워 읽었다. 책 속에는 아이들이 모르는 신비한 세계가 펼쳐지고 있었다. 어른들은 사랑도 연애도 마음껏 하고 가고 싶은 곳, 갖고 싶은 것, 하고 싶은 짓 다하면서 아이들에게는 하지 말라는 것은 왜 그리 많을까? 밤새 읽은 책들이 너무 재미가 있어 어젯밤에 다 읽지 못한 부분에 새롭게 펼쳐질 이야기를 맘대로 만들고 상상하다가 수업시간에 꾸벅꾸벅 졸고 선생님께 불려 나가 손을 들고 벌을 섰다. 책 속에 파 묻혀서 요지경 같은 어른들의 세계를 속속들이 엿보고 빨리 어른이 되어서 해보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다. 어른들 세계를 알만큼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나를 기저귀 뗀 어린이로 취급하는 어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또래 아이들과는 놀지 않았다. 매일 책 속에서 어른들의 세계를 엿보느라 밤을 새우던 나에게 공깃돌이나 굴리고 고무줄놀이를 하는 아이들이 유치하고 한심했다. 몰래 가져온 책을 읽다가 무서운 옆집 오빠에게 들켜서 쥐방울 만한 것이 뭘 안다고 어른책을 읽었느냐며 쥐어 박히고 뒈지게 혼이 났다. 학교 담임선생님도 특별한 관찰 대상, 불량한 아이로 곱지 않은 눈으로 나를 살폈다.
그날도 점심시간에 소설책을 들고 뒤 동산으로 올라갔다. 동산 근처에 비구니들만 있는 *골 승방이라는 암자가 있다. 어느 날인가 그 산속에 있는 큰 느티나무에 비구니가 목을 매어 죽었다. 며칠 후에 선녀처럼 아름다웠던 죽은 비구니를 짝사랑하던 총각이 뒤따라 목을 맸다. 암자에 땔 나무를 저다 주던 총각이었다. 그 후부터 잊을 만하면 한 사람씩 그 나무에 목을 매고 죽어서 한 많은 영혼이 깃든 귀신나무라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오는 곳. 수풀이 우거지고 인적이 드문 으스스하고 외진 곳이다. 나는 겁도 없이 그 나무 밑에 자리를 잡고 도시락을 까먹고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나는 귀신나무의 전설을 알지 못했다.
닥치는 대로 먹어 치우는 잡식성 동물처럼 허기진 내 호기심과 지적 욕구는 날마다 책 속에 펼쳐지는 별천지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어떤 책은 뭐가 뭔 지 알 수 없는 어려운 것도 많았다. 특히 시집이 어려웠다. 그 시절 모윤숙의 시, 렌의 애가는 격정적인 청춘의 고백의 시였고 많은 여고생들이 줄줄 외우며 멋으로 시집을 갖고 다녔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발로 밟으면 낙엽은 영혼처럼 운다. 낙엽은 날개소리, 여인의 옷자락 소리를 내곤 한다." 이 시에서 애타게 자주 부르는 시몬은 누구일까? 무엇인가 멋진 것 같은데 아리송하고 헷갈리고 도통 무슨 소리인지~. “가시는 걸음마다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지르밟고 가시옵소서…”김소월처럼 쉽게 쓰면 안 되나? 소월의 시어는 쉽사리 이해되는 조숙한 아이였지만 렌의 애가 속 은밀한 어른들의 감추어진 애끓는 연모의 은어는 너무 어려웠다.
그 시절에는 인기 작가의 문학작품들은 신문 연재를 통해 발표되었다. 김래성 씨의 소설 청춘극장이 연재되는 신문을 보려고 배달시간을 기다리고 전개되는 스토리에 끼지 못하면 문화인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때였다. 나도 옆집에 배달되는 신문을 기다렸다가 그 소설을 읽었다. 암튼 나는 시를 외무며 주고받는 언니들의 대화가 멋져 보이고 부러웠다. 나는 내 또래들을 젖 내가 난다고 은근히 무시하면서 잘 난 척 콧대를 세우고 동네 언니들을 멋 모르고 졸졸 따라다녔다. 가끔 언니들 연애편지 배달부도 했다. 나는 책을 통해 온갖 상상력과 윤기 나는 감성을 키우는 조숙한 아이였다. 빨리 어른이 되어 하고 싶은 것 다 해 보고 재미있게 살고 싶었다.
문학의 DNA는 내 어머니로부터 왔을까? 여자가 글을 알아봐야 친정에 편지질이나 한다고 딸들은 문맹을 만들던 그 시절 외할머니 눈을 피해 기름종이로 코팅한 언문 교본으로 홀로 한글을 익힌 어머니. 저녁마다 할머니들에게 심청전, 장화홍련전. 옥루몽 같은 이야기 책이 다 해어지도록 읽고 또 읽어 스토리를 다 외우셨다. 어머니는 가보 같은 소설책이 해어지는 것이 안타까워 서투른 언문 글씨로 한 자씩 필사를 해서 책으로 묶으셨다. 유품으로 물려받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 보물 같은 필사본은 유년의 가족사진들과 함께 사변 통에 없어졌다. 구성진 판소리 같았던 어머니의 낭랑한 목소리. 매캐한 석유등잔의 그을음 냄새. 리듬을 타고 일렁거리던 천장의 신비한 어머니의 그림자가 내 추억 속에 간직되어 있다. 겨울이면 고된 노동에도 거의 날마다 밤마실을 오던 동네 어머니들. 밤이 이슥하고 출출해지면 노천명의 시에서처럼 화롯불에 녹여 먹던 수수엿은 아니지만 생 고구마를 깎아 먹거나 찬 밥에 길게 찢은 김치를 얹어서 볼이 미어져라 먹던 어머니들. 나는 이야기 책을 읽어주는 어머니 옆에서 잠이 들 때면 낭떠러지로 떨어지면서 키가 길~게 길~게 늘어나 어른이 되는 꿈을 꾸었다.
나는 귀신나무 밑에서 춘원 이광수의 삼국유사 “조신의 꿈”을 모티브로 쓴 “꿈”을 읽는 중이었다. 못 생긴 중 조신과 태수의 아름다운 딸 달래의 애끓는 사랑이야기다. 뒤를 쫓는 태수의 군졸을 피해 도망을 다니다 굶어 죽은 아들을 땅에 묻고 조신과 달래는 헤어진다. 너무 슬퍼 눈물이 쏟아졌다 더. 읽을 수 없어 낙엽 위에 누어 흘러가는 구름을 올려다본다. 하늘의 구름은 바람을 타고 무심하게 모였다 흩어지며 어디로 인가 가고 있다. 나는 그렁그렁 젖은 눈으로 주문을 외우듯 무엇인가를 중얼거리다 부드러운 명주 이불 같은 안갯속 깊은 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멀~리서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아! 저 소리는 조신과 달래와 그 자식들이 차마 헤어질 수 없어 몸부림치며 우는 통곡소리인가? 애간장이 녹아드는 이별의 노래 인가?
점심시간에 없어져서 5교시가 끝나고도 교실로 돌아오지 않는 나를 한 목소리로 부르는 반 아이들의 소리였다. 뻐꾸기 소리와 아이들 소리가 숲에 부딪쳐 긴~메아리로 돼돌아왔다. 나른한 오월의 오후 달래와 조신의 절절한 이별의 슬픔이 내게 빙의가 되어 혼절하듯 깊은 동굴 속으로 빨려 들어갔나 보다. 혹시 귀신나무에 깃들어 있던 예쁜 비구니 혼령에게 이끌려서 저승 문 앞까지 갔었는지도 모른다. 삼라만상이 꽃으로 어우러지던 열한 살 무렵 오월 어느 날 오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