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감과 교육과정발표회

똥줄이 탄다는 기분이 이런 거구나..

금요일은 부모님들을 초대하여 교육과정발표회를 하는 날이었다.

10월 말부터 우리학교에서는 독감에 걸린 학생들이 늘어나는 추세였고 저학년 교실에서는 독감 때문에 10명씩 결석하는 사태가 심심치 않게 발생했다. 급식실에서 저학년 담임선생님을 만나면 "아이고~ 이 반도 독감 때문에 결석생이 많네요. 선생님도 건강 조심하세요~"라는 인사를 건네면서도 나는 우리반은 4학년이니 독감으로부터 안전할 거라는 택도 없는 믿음을 품었다.


그런데.. 아뿔싸! 지난주를 시작으로 아이들이 독감에 걸렸다는 연락이 하나 둘 오기 시작했다. 급기야 이번 주엔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평균 7~8명이 결석했고 교육과정발표회를 하는 금요일에는 5명이 결석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학급의 20%가 넘는 학생이 결석하는 건 나의 공개수업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

어머니들은 자녀가 아픈 것도 걱정이지만 단체공연에서 자녀가 빠져 같이 공연하는 다른 친구들에게 피해를 줄까 봐 몹시 미안해하셨다. 그녀들의 고운 마음씨가 고맙기도 하고 학급 전체에 퍼져있을 바이러스로 누구든 갑자기 열이 올라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기에 나는 미리 학부모님들께 단체문자를 보냈다.


<현재 학급에 독감 걸린 학생들이 많습니다. 학교 전체에서 저학년을 시작으로 조금씩 늘었는데 우리반은 이번 주에 가장 많은 아이들이 걸리고 있습니다. 혹시 자녀가 두통, 어지럼증을 시작으로 컨디션이 급격히 저하되다가 열이 38도 이상 오를 경우 병원진료와 검사 부탁드립니다. 교육과정발표회를 앞두고 걱정하시는 부모님도 계신데 아이들 건강이 먼저니 혹시나 단체공연에 지장을 줄까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남은 아이들이 빠르게 배우고 익혀 대신 발표하면 되고, 미숙하지만 서로 도와가며 완성해 보는 경험이 아이들에게는 좋은 공부가 될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많은 격려 부탁드리며 부모님께서도 건강 조심하십시오.>


호언장담했으나 아이들의 실력을 아는 나는 '제발 더 걸리지 마라' 마음속으로 기도했고 매일 달라지는 결석생 현황에 정신줄이 빠질 것 같으면서도 '어떻게든 될 거야'라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버텼다.

리본체조 같이 대형이 정해진 종목은 빠지는 아이가 생기면 다른 아이가 급히 배워서 그 자리를 메꾸고, 퀴즈처럼 두 명의 친구가 번갈아가며 문제를 내는 종목은 등교한 한 명의 친구가 도맡아 하고, 반 전체가 참여하는 합주는 적어진 인원 탓에 리코더 삑사리가 도드라지지 않게 삑사리 전문 학생을 따로 불러 철저히 보충지도를 시키면서 말이다.


드디어 발표회날.. 다섯 명의 어머니께 결석한다는 문자를 받은 후.. 리본체조 대체학생을 뽑아 중앙통로로 연습을 보내고, 셋이 하는 줄넘기였는데 졸지에 혼자 하게 된 학생을 불러 용기를 북돋아 주고, 독감 때문에 며칠 못 오다 발표회날 당일에서야 등교한 학생에게는 리허설을 시켜보고 발표회 10분 전에 아이들을 다 불러 모아 정신교육까지 시켰다. 4월 공개수업 때 유난히 친절한 내 말투를 문제 삼았던 장난꾸러기들이 이번에는 무엇을 문제 삼을지 모르니까...


부모님이 밖에서 자녀들이 싫은 소리 안 듣게 집안에서 때때로 엄하게 키우시듯 선생님도 지금껏 그런 마음으로 가르쳐왔다. 하지만 오늘은 매우 친절해질 예정이다. 선생님의 친절한 말투는 내가 너희를 이리 귀하게 여기니 부모님들이 본인 자녀뿐 아니라 우리 반 모든 학생들을 귀하게 여겨주었으면 하는 선생님의 바람이다. 그러니 너희들도 친구들의 발표를 진지하게 지켜봐 주고 큰 박수로 격려해 주면 좋겠다. 지금까지 열심히 연습해 왔으니 떨지 말고 이 시간을 즐겼으면 좋겠다. 비록 소박한 발표회이지만 이런 작은 무대에서의 경험이 나중에 큰 무대에서의 경험으로 확대될 것이니 열심히 잘 마무리하자!


합주에서의 리코더 삑사리도 눈에 띄지 않았고 리본체조도 리본 꼬이는 일 없이 잘 마무리했고 졸지에 혼자 발표하게 된 아이들도 쫄지 않고 씩씩하게 잘 발표했다. 발표회를 마친 후 나는 발표회 현수막 앞에 선 아이들의 모습을 가로로 한 장, 세로로 한 장 사진을 찍어 모든 부모님께 보내드렸다. 발표회 때 사진촬영을 삼가달라는 사전 안내가 있었기에...


독감이라는 비상사태에서도 아이들은 끝까지 참 잘했다. 하지만 한 가지 씁쓸한 것은 안 찍는 척 휴대폰의 각도를 조절하며 사진을 찍으신 부모님이 몇 분 계셨다는 것. 찍고 싶은 그 마음은 이해하지만 부끄러움은 어쩌면 아이들의 몫이 될지도 모르는데....


매거진의 이전글아이 앞에서 만큼은 제발 좀 참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