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선다형 문제만 출제되던 시험지에 서술형 문제가 추가되기 시작하던 시기는 내가 고등학교 1학년에 올라갔을 때였다. 시험 유형이 바뀐다는 소식은 내게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고등학교에 올라가면 공부해야 할 양은 많아지고 내용은 어려워지는데 답을 찍을 수도 없고, 푸는 시간도 오래 걸리는 서술형 문제가 나오다니. 당혹스럽기도 했고, 왜 하필 우리 때부터 시행되는 것일까 하는 분하고 억울한 마음도 들었다.
그렇게 분하고 억울한 마음 반, 긴장되는 마음 반으로 고등학교에서의 첫 시험을 봤다. 서술형 문제는 생각보다 어렵게 출제되지 않았다. 출제자의 의도대로 답변을 적을 수 있도록 <조건>이나 <보기>를 제시하기도 했고, 교과서를 충실히 공부한 학생이라면 어렵지 않게 답변을 적을 수 있는내용을 묻기도 했다. 여러 가지 답안이 나올 수 있는 열린 질문으로 출제할 경우, 정답과 오답의 경계가 애매해 채점하기 까다롭기 때문이었다.
그 뒤로 서술형 문제는 나를 더 이상 난처하게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를 곤란하게 만드는 질문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물음표 살인마인 내 친구가 묻는 ‘너는 그걸 왜 좋아해?’와 같은 질문이었다. 그 질문에는 예상 답안이 없었고, 그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 참고할 만한 교과서나 문제집 같은 것도 없었다. 답의 개수가 하나일 수도 무한대일 수도 있었고, 그 모든 것이 진실일 수도 거짓일 수도 있었다.
모든 질문에 정답이 있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정답을 찾기 위해 애를 쓰고, 누군가 정답이라고 규정 지은 것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암기한 성실한 학생으로서, 이 질문은 내게 난제와도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 질문을 들으면 말문이 탁 막히고, 머리가 새하얘졌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 가며 생각하다가 나오는 말이라고는 ‘그냥 좋아.’라든가, ‘예쁘니까, 맛있으니까, 재밌으니까.’와 같은 평면적인 언어들이었다. 그렇게 대답하고 나서는 내 마음을 온전히 표현하지 못한 것 같아 늘 찝찝하고 석연치 않았다.
이러한 경험을 반복적으로 겪다 보니 새로운 능력에 대한 갈망이 생겼다. 그것은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내 마음이 느끼는 그대로 설명하는 능력이었다. 갈망이 점점 켜져 애호가들의 취향을 가득 담은 책들을 닥치는 대로 찾아 읽을 때쯤 조원재 작가의 <삶은 예술로 빛난다>라는 책을 만났다. 이 책의 표지에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대답’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지만, 사실 나는 이 책을 통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해법보다는 예술에 대한 한 사람의 마음과 그리고 그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이 궁금했다.
하지만 이 책을 끝까지 읽으면서 깨달은 바는 좋아하는 것을 표현하는 방식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방식이었다. 작가는 예술을 정성스레 좋아했다.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는 허기진 사람이 아니라, 음식을 음미하며 맛의 조화를 느끼고 요리사의 장인 정신을 상상하며 미소 짓는 미식가처럼 그렇게 정성스럽게 예술을 좋아했다.
이 책에는 그런 정성이 묻어났다. 작품을 부지런히 관찰하고 온몸으로 감각한 과정들을 통해, 떠오르는 감정과 사유를 꼼꼼히 메모하고 섬세하게 가다듬는 흔적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그 정성은 사랑의 깊이를 표현했다. 예술에 대한 해박한 지식만 믿고 작품을 감상하는 것을 게을리하는 사람은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의 깊이를. 내가 그렇게 표현하고 싶었던 사랑의 깊이를.
나는 좋아하는 것 앞에서 게으른 사람이었다. 무엇인가를 정성스레 좋아하는 방식을 잊어버려 하나를 진득하게 바라보며 향유하고 사유할 때 사랑의 깊이가 나온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 언젠가 나의 말과 글에도 사랑의 깊이가 느껴질 때까지 정성스레 좋아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