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그림을 보며, 저마다의 할머니를 떠올리지요.
<할머니의 그림 수업> : 그림 선생과 제주 할망의 해방일지 / 최소연 지음 / 김영사(2023)
내가 첫 아이를 낳고 난 후, 내 삶의 가장 큰 전과 후의 변화가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늘 신기했던 것 중 하나는 내가 ‘엄마’가 되었다는 사실 었다. 그 못지않게 내게 신기하고도 어색하게 느껴졌던 것은 우리 엄마가 바로 ‘할머니’로 불리게 된 것이었다.
작은 아가가 동그란 입으로 오밀조밀 자음과 모음을 조합해 새로운 단어를 지어낼 때면 그렇게 신비로울 수가 없었다. 아가는 할머니는 ‘할미’라고 부르곤 했는데, 할미는 아가의 소중한 친구가 되어주었다. 나의 아가와 할미가 된 우리 엄마가 함께 노는 모습을 바라볼 때면 내 안에 흐르는 다른 두 종류의 사랑이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똘똘 뭉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옆에서 우리 엄마를 지켜본 바에 의하면, 할미는 꽤 낭만적이고 귀여운 존재다. 엄마의 자리에서는 때때로 호랭이처럼 무서워지기도 하고, 촌철살인을 날리며 가슴을 따끔하게 하기도 하지만… 할미는 그렇지 않다. 참으로 인자하고, 사랑이 늘 흘러넘치며, 귀여운 유머를 장착한 존재다.
[할머니의 그림 수업]을 읽으니, 우리 엄마 ‘할미’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할머니가 할머니의 마음으로 그린 그림들이기에 먹먹한 울림이, 가슴 찡한 여운이, 쿡- 하고 웃음이 절로 나오는 유머도 한 스푼 들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우리 인류에서 아가 못지않게 본디, 귀여운 존재가 바로 이 지구의 할미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만 아가와 할미들의 차이점이 있다면, 아가의 마음속에는 말랑말랑한 잴리의 기억들이 가득 들어 있고, 할미들 가슴에는 긴 세월 동안 담고 있느라 조금은 딱딱해지고, 살짝 건들면 부서져버리고 말 듯한 바삭한 쿠키 같은 기억들이 조금 더 많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아가의 동근 어깨는 귀여운 쌀 한 톨처럼 보이고, 할머니의 동근 어깨는 식구들 밥 해 먹이느라 왠지 더 가냘퍼져서 두툼한 스웨터를 걸쳐주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한다. 그 작은 어깨로 둥근 밥상에 앉아 홀로, 긴 밤 지새우고 새벽녘까지 그림을 그렸을 할머니를 떠올린다. 그림이랑 벗 되었을까, 그림이랑 이야기 나누었을까, 그림과 함께 저문 하루를 보내고, 새 하루를 맞이했을까. 할미는 “내 나이가 여든여덟 개인데 내년이 어떻게 있냐(윤춘자 할망)“고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부희순 할망은 ‘마음속에 말이 그림을 배우면 조금씩 나올 것 같아.’라고 <부농 필통>을 그리며 글을 적었다. 할머니들의 그림 속에 할머니들의 말과 마음이 담겨있다. 그래서 더욱 귀하게 읽었다.
한마디로 [할머니의 그림 수업] 책은 혼자 보기 아쉬운, 제주 방언으로 ‘아꼬운 존재들의 아꼬운 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면 이미 할머니 저마다의 인생사가 하나의 예술작품이요, 할머니들이 그 주인공이다. 이제 한글을 배운 것이 원통하고, 이제야 그림의 재미를 알게 되어 기쁜. 그래서 더 한 장 한 장 애틋하게 그렸을 할머니의 작품들. 아꼬운 예술 작품들이 책 속에서 반짝반짝 그녀들의 이야기와 함께 빛을 내고 있다. [할머니의 그림 수업]을 보면 우리 모두 저마다의 할머니를 떠올리며 책장을 넘기게 될 것이다.
2024년 7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