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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홍시 Aug 20. 2023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산다는 것

일과 취미의 경계선



최근 유튜브를 보다가 이러한 말을 본 적이 있다.

"하고 싶은 일을 해라"라는 막연한 말로 정녕 나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말이었다.


그 유튜버의 말인즉, 사람은 '하고 싶은 일'로 본인을 찾으려 하나, 인간은 본능적으로 '노는 것'을 좇는다고 한다. 놀고 싶고, 쉬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성인지라, 그것만으로는 자아실현을 할 수 없고 그저 본능의 충족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누구나 자고 싶어하지만 그 잠이 내 자아가 아닌 것처럼.


그리하여 "사람은 그냥 하고 싶은 '쉼'이 아니라, 하기 싫은 '일'을 하는 것으로만 비로소 자아를 정의하며 실현하는 높은 단계의 욕구충족이 된다"라는 말이었다.






나로 말하자면 '내가 하고 싶어하던 일을 직업으로 가진', '굉장히 축복받은 유형의 사람'이다. 하지만 나 역시 이 일이 직업이 되면서 흥미를 크게 잃었었다. 아마도 그 유튜버의 말처럼, 그 행위가 단순한 휴식 이상의 의미가 되면서 그게 더 이상 휴식이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리라.


러나 중압감과 압박감 속에서 꿈과 흥미를 잃는 일이 비단 나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놀고 싶어하고, 그것이 업무가 되는 것처럼 느끼는 순간 흥미를 잃을 지도 모른다.


내 글을 이미 읽던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나는 그동안 항상 도망치던 사람이었다.


내게 일과 취미의 경계선은 중압감으로 그려졌던 것 같다. 그래서 즐겁게 하던 어떤 분야라도, 막상 중압감에 휩싸이면 또다시 도망쳐야 할 구렁텅이로 변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수많은 영역들을 넘나들며 도망가고 또 도망쳤다.


다만 나는 지금 인디 성우로 일하고 있는데, 동시에 업무가 된 나의 연기 영역에서는 도망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이 직업인으로서 정말 부끄럽지만) 난 연기가 싫고 무서웠었다. 15년의 시간 동안 그토록 좋아서 연습해 왔으면서, 공채시험 일정이 나올 때마다 나는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그런데, 난 최근 내가 그렇게나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던 연기가 재미있어졌다. 무려 만 3년여만의 일이다. 심지어 연기에 대한 중압감을 아직 느끼는 상태인데도 연기가 재밌었다!


그 재미를 다시 발굴한 기분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 희망의 불씨를 찾은 것 같기도 하고, 영영 잃어버렸던 고대 유적을 되살려낸 순간 같기도 했다. 내 안에서 너무나 큰 상실감의 흔적을 남기고 사라졌던 것이 돌아온 기분. 비로소 내가 완전해질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 뭉클하다는 말은 아마 이럴 때 쓰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도대체 내게 있어 취미와 일의 경계가 무엇이기에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물론 취미는 하고 싶을 때만 할 수 있고, 업무는 하기 싫을 때도 해야 한다는 차이가 있지만, 내가 업무 영역으로 넘어가면서 스트레스를 받았던 가장 큰 이유는 다음과 같다.


내가 느낀 취미와 일의 핵심 차이는, '나의 작음이 문제되느냐의 여부'였다.


취미로 할 때는 내 연기 실력이 부족해도 괜찮았다. 배워가는 중이니까, 더 늘 거니까. 내보이기 부끄럽지 않았다.


허나 이 영역이 직업이 되었을 때, 난 내 실력이 부끄럽고 민망해졌다. 그 이름의 무게에 비하면 내 실력이 너무나 초라하게만 느껴졌다. 직업으로 선택한 그 순간의 실력으로 영원히 고정되는 게 아닌데도 말이다!


내가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던 건, 내가 최근에 내 자신의 기를 살려주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최근 커다란 압박감에 짓눌리지 않도록, 내 자신감과 자존감을 조금씩 키워가고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커진 자존감은, 오늘의 내 실력만으로 내 자신을 정의하지 않게 했다. 나중에 나아질 나의 미래만큼의 자신감을 끌어오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나의 작음이 문제되지 않게 되었을 때, 나는 비로소 연기의 즐거움을 되찾았다.




내가 왜 업이 되니 내 작음을 수치스러워했을까 생각해보면 자연스럽게 하나가 떠오른다.


내 주변 사람들은 나를 사랑했고, 그들의 방식은 대개 격려보다 걱정이었다. 그들은 나의 현재 실력으로 이 업계를 쉬이 살아갈 수 없음을, 이 업계가 얼마나 빡빡하고 힘든지를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것 역시 내가 당연히 각오해야 하는 일임을 안다. 이런 각오 없이 그냥 세상에 나온다면, 말 그대로 쓴 맛을 제대로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진정 이 일을 '즐겁게' 해 나가려는 마음을 잃지 않기 위해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잘 해낼 수 있을 것이기에, 오늘의 부족함이 영원한 문제가 되진 않으리라'는, 나의 작음을 인정하되 점점 커질 수 있다는 확신 또한 필요했던 것이다.


나는 둘 중에서 각오만 앞서서, 오늘의 작은 나를 걱정하고 수치스러워하느라 노력의 즐거움을 잃어버렸다는 걸 알았다.


내가 재밌게 하던 모바일 게임에서 인상 깊게 본 말이 있다. '정말 작은 조각이지만 여전히 빛이 난다.'라는 말이었다.


그 말처럼 나는 아직 한참 부족하고 정말 작다. 그렇지만 오늘의 내가 꼭 완성되어 있어야만 빛나는 건 아니다. 내가 앞으로 점점 크고 더욱 화려해지더라도, 나는 오늘의 작은 나를 항상 기억할 것이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도, 또 나보다 참 잘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난 또 부끄러워지고 내가 초라하게 느껴지겠지만...  그래도 괜찮다. 이제 오늘의 부끄러움이 내일의 겸손함이 되고, 오늘의 작음이 내일의 꾸준한 노력을 낳을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든다.

 

바라건대, 작지만 반짝이는 모두가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즐겁고 행복하게 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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