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덟, 고시원 생존기 139일차
25. 11. 24 MON
누군가와의 만남이 편안하다면, 그 사람이 나를 위해주는 마음이 내내 흐르고 있다는 뜻이다. 세심한 눈으로 나를 살피며 나의 편안함을 위해 배려하고 있는 것이다. 침묵마저 편안하다면, 끊긴 대화 속에 서로를 생각하는 고마운 마음과 배려를 했던 시간이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도 당연히 여기며 소홀해지지 않길.
당연한 것은 사실 아무것도 없으니까, 지금의 고마움을 잊지 않길.
- 도연화, 가장 아끼는 너에게 주고 싶은 말 中
앞만 보고 달려오던 수능이 끝나고 다시 고시원으로 돌아왔다. 오늘은 언젠가 흐릿해질 행복을 붙잡아두고 싶어서 글을 쓰고 있다.
여기 온 지 두 달쯤 됐을 때였나? 그때 나는 샤워만 하면 슬펐던 기억이 난다. 가슴에 남은 흉터가 함몰되고 지렁이보다 더 징그럽게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작년에 흉부외과 수술을 받고 회복될 시간도 없이 그놈의 응급입원 사건.. 이 생겨서 치료와 회복시기를 놓쳤다.
이후에 흉터 크기를 줄이려고 올해 2월부터 스테로이드 주사를 맞았지만, 결국 부작용이 생겨서 돌이킬 수 없었다. 그냥 속상함으로 범벅된 감정을 껴안고 살아야 했다.
무탈한 하루를 보냈다면, 아무 일 없이 무료했던 게 아니고 위기의 순간들이 전부 나를 비껴나갈 만큼 행운이 따랐던 거다. 지극히 평범하다고 느낀 순간은 어쩌면 가장 특별하고 행복한 순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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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팔티에서 뽀글이 후리스를 입는 그 시간 동안, 이곳에 계신 분들의 온기를 받으며 지냈는데 그중 실장님이 가장 큰 힘이 되어주셨다.
가끔 울상인 나에게 조건 없는 확신을 주셨고, 수능 전날엔 네잎클로버와 쪽지를 건네며 응원을 해주셨다. 수험표를 받으러 가는 버스 안에서 쪽지를 읽으며 '나도 이런 어른이 되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감사함을 전하기 위해 나는 마카롱과 편지를 드렸고
카페에 가서 대화를 나눴다.
실장님을 보며 받았던 느낌은 '인자강(인간 자체가 강하다)'이었는데, 오늘 그 이유를 알게 됐다.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을 견뎌오셨기에 나에게 진심으로 조언을 해줄 수 있었고 응원해 주셨던 거였다.
이러한 감정을 sonder라고 부른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만큼이나 복잡한 삶을 살고 있다는 걸 알게 되는 것. 타인을 이해하는 시선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확장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5년이 넘는 시간 동안 괴로움을 겪지 않았더라면, 지금과 같은 감사함을 느낄 수 있었을까?
“음, 실장님은 그 시간들이 후회되거나 속상하진 않아요?”
- 과거의 제가 없었으면 지금의 저도 없으니까요. 다시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했을 거 같아서 후회는 없어요.
그렇게 두 시간 넘게 얘기를 나눴다.
내일은 심장박동기 점검을 받으러 가야 한다. 수명을 확인하고 재수술 시기를 예측하는.. 그런 시간. 아침부터 스트레스가 가득한 상태였다.
“그럼 저녁으로 매운 거 먹으러 갈래요? 여기 미친 듯이 매운 짬뽕 있는데.”
- 근데 저 맵찔인데용.
약간 내 의사와 상관없이 불짬뽕을 먹게 됐다.
아무튼 스트레스가 좀 풀린 거 같았다.
그리고 지난 몇 개월을 돌아보면, 오늘이 가장 자주 웃은 날인 거 같다. 웃긴 썰과 함께 재밌게 사는 법을 알려주셨고, 멘탈지킴이 겸 인생 멘토가 되어주셨다.
지금의 고마움을 잊지 않고
나도 누군가에게 다정함을 전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