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름 Aug 03. 2023

오늘도 살아가는 나에게

“20살. 내 생일, 나는 생을 마감하기로했다.” 따돌림, 그리고 4년뒤

 1화

”믿었고, 믿었고, 믿었기에 속았다.“



 나는 14살 죽기로 결심을 했다.

 당시 나는 마음이 많이 힘든 아이었다. 슬픔에 잠겨 하루 종일 우울해하곤 했다.

14살 나는 친했던 친구로부터 괴롭힘을 당했다. 그리고 그 괴롭힘은 내가 졸업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처음 그 친구(A)를 만났던 건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초등학교 5학년 한창 학급 임원도 하고 전교부회장도 했던 걸 보면 나는 꽤 밝았던 아이였던 거 같다.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해서 들어갔던 일러스트 수업에서 A를 처음 만났다.

그리고 우리는 6학년 때 같은 반이 되면서 많이 친해졌다. 가끔 영화도 보러가고, 어머니께서 내가 친구랑 노는 걸 좋아해주셔서, 놀때 태워주시기도 하고 계절밥상에서 밥을 사주시기도하고 꽤 재밌었던 것 같다.

그러나 사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이 관계는 이미 금이 가고 있었던 것 같다. 아니, 사실 자세히 말하면 내가 못 믿었던걸지도 모른다.

 A가 나를 점점 무시하는 말들로 말을 걸어오고 어느 순간 다른 친구와 있을 때 나는 모르는 둘이서만 아는 이야기를 하면서 웃고, 나에게 툭 짜증을 내고, 나를 비웃을 때. 나는 이 모든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A도 표면적으론 나와 함께 다녔기 때문에 별로 신경 쓰지 못했던 것 같다. 괜찮은 줄 알았다. 우리의 관계가.

 단지, A가 나와 조금 더 친한 친구가 생겼다고 생각했지. 나를 친구 그 이하의 것으로 본다는 생각은 못했었다. 순진한건지 멍청한 건지 어렸을 때의 나는 암튼 그랬다.

 중학교 1학년 A와 다른 반이되고 A가 나와 거리가 멀어진 것을 느꼈다. 물론 크게 신경 쓰진 않았던 것 같다. 여전히 친하리라 생각했으니까.

 어쩌면 사실 1학년 때도 A 뿐만 아니라 다른 친구들에 의해서 힘들었기 때문에 A에 대해서 생각을 잘 못한 거 같기도 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서 우리는 중학교 2학년이 되었다.  반을 옮겼을 때 A와 같은 반이 되었다는 사실에 좀 기뻤다. 그리고 반에 다른 밝은 친구들도 있었는데 그 친구(B)도 내가 좋아했던 친구였기 때문에 첫날은 괜찮았던 거 같다.

 물론 반 배정에 대해서는 원망이 있긴 했다. 나와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들과, 그러니까 많이 친했던 친구들과 다 떨어진 것 때문이었는데, 사실 같이 친했던 친구들 4명 중 3명이 같은 반이고 나만 홀로 떨어져서 조금 원망했던 거 같다. 게다가 2학년으로 같이 올라온 반친구가 나랑 다른 남자아이 하나 밖에 없었다.  다른 선생님들께서는 내가 원래 잘 하니까 혼자서도 잘할 거라는 말을 하셨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말해서 좀 억울하기도 했다. 순전히 많은 친구들과 친해질 수 있었던 건 솔직히 나에겐 큰 노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성격상 밝은 면도 있었지만, 트라우마도 있었고 사람에게 잘 상처 받았기에 마치 사람이 무서워 짖으면서도 꼬리를 흔들며 다가가는 강아지처럼 나는 친구를 좋아했지만 그만큼 많이 무서워했다.


 그렇다고 초반부터 위태로웠을까? 그건 아니었다. 그러나 사건은 작은 일로 시작되었다.

 

 사실 나는 시끄러운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청각적으로 좀 예민했고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다. 그래서 A와 그 친구들이 떠드는 것에 잘 끼어들거나 하진 않았다. 귀가 밝은 편이긴 했지만 왼만해서 남의 이야기에 신경을 쓰진 않아서 그들이 평소에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도 몰랐다.


그렇게 좀 시간이 지난 뒤였다.

 담임 선생님께서 나를 교무실로 부르셨다. 조금 부연 설명을 하자면 담임 선생님께서는 젊은 여자분이셨고 올해 초임이라고 하셨다.

 선생님께서는 나와 B를 부르셨는데, 사실 내가 어렸을 때 트라우마와 착한 아이 증후군 때문에 선생님들을 무서워했었다. 애써 아닌 척하려고 했지만 교무실에 불려가는 상황 역시 나에게는 온 몸에 식은 땀이 흥건할 정도로 무서웠었다.

선생님께서 나와 B를 보고 B의 다친 손가락을 보면서 내가 그랬냐고 물어보셨다.

사실 이 상황부터 이해가 안되었던게 그 친구의 손가락은 내가 그렇게 한 게 아니다.

그 당시 우리 학년 학생들은 농구를 했었는데, 농구 경기 도중 내가 공중으로 패스하려고 던진 공에 B가 가져가려다가 스스로 부딪힌 거였다. 물론 이 사실을 B도 알고 내가 한게 아니라고 말했고, 당시 체육 시간 체육 선생님께서도 알고 계셨다.

그럼 담임 선생님께서는 왜 이런 일로 날 부르신걸까? 그 뒤로도 몇번 내가 한 일이 아닌 일로 불려갔었던 것 같다. 덕분에 아이들의 눈에 띄었고 난 그 상황을 대수롭게 여기지는 않았지만, 내가 별로 말주변이 없어서 아이들은 내가 혼났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날 A의 어머니께서 우리 어머니께 전화를 하셨다.




2화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



어머니께 들어보니 전화 내용은 이러했다.

A의 어머니께서는 내가 반 친구를 다치게 해서 A가 날 걱정해서 나를 제외한 단톡방을 만들어 그 이야기를 친구에게 물어봤다는 거였다. 그리고 내가 다치게 한 거 자기도 걱정하고 있다고.

사실 지금도 이 글을 쓰는 동안 다시 생각하려니 화가난다. 이 때 알았어야 했다. A는 내가 없는 단톡방에서 내 이야기를 꺼내면서 내가 B를 다치게 했다고 말하고 다닌 거였다는 것을.

어머니께서도 나에게 사실을 확인하시고는 속상해 하셨고, A의 어머니께,

학교에 여쭤봤고 담임 선생님께서도 아니라고 하셨고, 그 친구도 내가 그런게 아니라고 하셨다. 단톡방을 A가 만들 수는 있는 거지만, 우리 애가 없는 자리에서 우리 아이 이야기를 다른 아이와 하고 사실이 아닌 이야기를 하는 건 걱정이 아니러고 하셨던 것 같다.


가끔 생각한다. 어머니는 아직도 이때 일로 내가 받은 상처 때문에 더 확실하게 날 돕지 못한 걸 미안해 하신다.

그렇지만, 내가 정말 엄마가 없었으면 이 시기를 버틸 수 있었을까 싶다.


뭐, 어쨌든 일은 이렇게 흘러갔다. 그때까지도 별 일이 없을 줄 알았다.

그 다음 체육시간이 끝나고 A가 울면서 미술실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그때부터 뭔가 본격적으로 괴롭힘이 시작되었던 것 같다.

그 일 이후 교실에서 A와 B 그리고 교실 아이들이 나를 둘러싸고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이들이 하는 이야기가 내가 낄 이야기가 아니었고(주로 남자 이야기나 술을 마신 이야기를 했다.), 나는 시끄러운 걸 좋아하지 않았지만, 조금 참으려고 했다. 곧 자리를 바꿀 테니까.


그러나 애석하게도 내 인내를 무시하듯 선생님께서는 자리를 바꾸시지 않으셨고 나는 그 자리에 또 끼었다.

근데 이후에도 자리 문제는 계속 있었다. 덕분에 별로 듣고 싶지 않았던 남자 이야기라든지, 술마신 이야기 다른 친구의 뒷담등을 실컷 들은 후에야 자리를 옮길 수 있었다.

 쉽게 옮긴 것도 아니었다. 선생님께서 끝내 그 아이들 사이에서 나를 빼주지 않았고 계속 묶으셔서 이 상황을 아신 어머니께서 연락을 했고, 그제서야 선생님께서는 자리를 바꾸기로 하셨다.

아니 뭐, 자세히 말하면 자리를 바꾸고 또 그 아이들 사이에 앉았는데, 내가 차라리 남자 애들 앉는 곳에 앉겠다고 해서 겨우 빠져나온 거였다. (당시 우리반은 교실의 반은 여자, 교실의 반은 남학생이 앉았는데, 그 아이들이 소수가 아니었던 지라 어쩔 수 없이 여자자리에서는 둘러쌓일 수밖에 없었다.)


만일 이렇게 모든 이야기가 끝났으면 어땠을까. 난 지금쯤 사람을 믿고, 사랑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 아이들은 그만두지 않았다.


 옮겨진 자리 내 책상 옆에 거울이 붙어 있었다. 내가 책상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으니 A와 친구들은 대놓고 내 책상에 화장품 더미를 올려두고 화장을 했다. 내가 내 물건 놓을 자리도 없을 정도로. 솔직히 불편한 티를 내려고 했지만, 당시 착한 아이 증후군이 있던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몇 달간 계속 되었는데, 어머니께서 이 상황을 아시고, 선생님께 말씀을 드리셨다. 전화로 연락을 드렸으나 선생님께서는 원래 거울 자리라서 바꿔줄 수 없다고 하셨고, 아이들도 잘 사용하고 있다고 거울을 이동하지도 못하게 하셨다. 기여코 내가 쉬는 시간에 책만 읽는 이상한 아이라고 하셨다.

 화가 나신 어머니께서는 선생님께 대면 상담을 요청하셨고, 선생님께서는 상담 동안에도 끝까지 A를 감싸며 나쁜 뜻은 절대 없었을 거라고 했다.

 솔직히 상식 선에서 이해가 안되었지만, 나쁜 뜻이 없었다면 내 뒷담을 하며 그렇게 나를 위협적으로 몰아세웠을까.


 사실 내가 몇 번 이 상황을 피하려고 조퇴를 한 적이 있는 데 그때마다 다음 날 학교에 왔을 때 책상에 딸기 우유가 엎어져 있었다.

단언할 수는 없지만, 그 아이들이 항상 내 자리 옆에서 떠들 때마다 마시던 거였다. 그리고 실제로 그 무리 친구 중 하나가 자신이 엎은 거라고 말도 했다. 그리고 실수로 흘렸다면 닦는게 맞는 일 아닌가. 그 상황을 내가 다음날 학교에 올때까지 지속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하무렴 담임 선생님조차도 이렇게 엎어져 있던 걸 몰랐을까.

더 이상 이 교실에서 나는, 반 아이들도 담임 선생님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고립되어갔다.


그리고 1년이 지났다.




3화

“눈에 보이지 않으면 믿지 않는다.“



 A가 전교회장 선거에 나간다고 했다. 듣고 어이가 없었다.

 담임 선생님께서 내가 한 말을 한 마디도 학폭위에 알리지 않았으니 당연히 A에게는 자격이 주어졌고, A는 런닝 메이트를 구했다.

그리고 그 런닝메이트(C)와도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아니 뭐 솔직히 말하면 사이가 좋았는데, 지금은 더 이상 그럴 수 없게 된 것 뿐이다.

그렇게 선거가 끝나고 겨울 방학 동안에 나는 성당 캠프에 간 적이 있었다. C랑 내 친구랑 나랑 셋이 잠깐 선생님들 화장실 간 거 기다리면서 에버랜드에서 이애기를 하고 있었는데, C가 갑자기 나에게 내가 있늠 부서를 없애버리겠다고, 자기가 권력인데 이제 못할게 뭐가 있냐고 했다.


동아리.

그랬다. 교실을 떠나 유일하게 도망칠 수 있었던 내 피신처였다. 괴롭힘을 피해 부실에서 매번 점심을 굶고 가서 서가 정리를 하다 종이 치기 직전에 교실에 들어오곤 했다.

그걸 물론 C도 알았을 거다. 사실 C와 사이가 어색해 진건 전교회장 선거 전부터 C가 날 볼때마다 이겨버리겠다고 내가 너 이긴다고 계속 시비를 붙여왔기 때문이었다. 아마 난 이때 전교회장 선거에 안 나갔는데, 이게 좀 분했던 걸 수도 있다.

그러나 이때도 날 도와주는 사람도, 왜 말을 그렇게 하냐느니 C에게 말해줄 사람도 없었다. 그렇게 나는 한 번 더 죽기로 결심했다.


 3학년에 올라가기 전 어머니께서 내가 너무 속상하는 걸 아시고 학교폭력 담당 선생님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놀라운 점은 그동안 담임 선생님께 구제해 달라고, 지켜봐 달라고, 그리고 A가 괴롭힐 때마다 말씀을 드렸는데, 오히려 학폭위 담당 선생님께서는 하나도 들은 게 없으셔서 그런 일이 있는 줄 전혀 몰랐다고 하셨다.


아마 이 날 나는 인간에 대한 신뢰의 마지막 끈을 놓았던 거 같다.

그리고 더욱 충격적인 것은 그동안에 올라온게 없어서 증거가 없다는 말.

그날 나는 죽기로. 온전하고 견고하게 결심했던 것 같다.

심지어는 당시 있던 정황상으로 학폭을 신고 했는데, 선생님께서는 대면 사과를 받고 싶냐 어떻게 하고 싶냐 여쭤보셨고, 난 이에 더 이상 그 친규를 마주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사과 안 받고 처벌해달라고 했다.

이후 내가 알게된 것은 그 아이는 그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중3이 되었을 때 여전히 그 아이는 복도에서 마주칠 때마다 거의 소리지르듯이 가식적으로 웃어댔고 그 상황에 매번 놀라고 위협을 느끼던 나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가보기로 했다. 솔직히 내가 지나갈 때마다 지들끼리 나를 쳐다보며 이야기하는게 이제는 정말 견딜 수 없을 지경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곳에서 선생님께서는 나를 믿어주셨으나 여전히 그 아이가 물리적으로 괴롭힌게 없어서 들어줄 수 없다고 하셨다. 다만 A가 그런 아이인 거는 알고 있으니 언제든 필요하면 오라는 말씀만 하셨다.


위로. 조금 위로가 되긴 했지만, 사람에게 1년간 받은 상처는 치유되지 않았다. 그렇게 코로나가 터졌고, 난 스스로 고립되기로 결심했다.



4화

“스스로의 목을 조이며”


 사실 지금까지 내가 잘 설명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솔직히 내가 당한 일을 더 말하려고 했지만 아직도 온전히 극복하지 못했는지 더 쓰기 힘들었다.

 게다가 이 글이 폭로의 목적은 아니고 그동안의 기록과 나 자신을 돌아보기 위해 쓴 거였기에 불쾌한 그림을 자세히 설명하진 않았다.


 2학년 내내 나는 아침에 일어나기를 싫어했다.

아침에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은

‘죽고 싶다. 눈 뜨고 싶지 않았다.’

자기 전에 하는 생각은

‘내일 아침에 눈을 못 뜨게 해주세요. 내일 죽어서 하느님 곁에서 일어날 수 있게 해주세요.’

그리고 나는 죽으려고 커터칼로 그으려고 했었다. 그러나 금새 나에게는 그 정도의 용기도 없다는 것을 알고 포기해버리기도 했다.


후편에서 계속



작가의 이전글 김치찌개, 두부 한 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