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러 와! 의 조건
입사 5년 차에 결혼했다. 좋은 타이밍은 아니었다. 자금의 대부분이 아파트 전세금에 묶여 있었기 때문이다. 주변엔 기혼자가 점점 늘어갔다. 돌아보니 어느새 6년째 연애 중. 변화가 필요했다. 완벽한 때는 아니지만 지금처럼 결혼하고 싶은 적이 또 있었던가. 마음먹었을 때가 적기다.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퀘스트를 시작했다. 결혼 미션의 끝판왕은 신혼집 마련. 10년 전에도 만만치 않은 집 값. 난관 앞에 모세의 기적은 없었다.
부모님의 지원을 받은 친구들은 서울 30평대 아파트 전세도 무리 없이 들어갔다. 자가로 시작하는 지인도 있었다. 대부분은 경기도 신도시에 터를 잡았다. 예비부부 중 한쪽이 자취하는 경우엔 살고 있던 집에 살림을 차리기도 했다. 우리는 마지막 케이스였다. 남편이 살던 강남의 원룸에서 시작한 신혼생활.
처음부터 계획한 건 아니었다. 집을 보러 서울과 경기도 A시를 돌았다. 마음에 드는 집은 예산 초과고, 예산이 맞으면 마음에 안 들었다. 좀처럼 타협하지 않는 기대치와 예산. 추운 겨울, 여러 곳을 돌다 지쳐 말했다. "그냥 자기 집에 들어가자!" 남편은 반색했다. 차마 먼저 꺼내지 못한 선택지였나보다. 큰 결정을 끝내니 마음이 편해졌다. 돌고 돌아 제자리인가. 싱거운 결론이지만 복비도 굳고 일석이조였다.
작고 소박한 원룸. 그럼에도 위치가 강남이라 많은 오해를 샀다. 청첩장을 돌리자 다들 집을 어디에 구했냐며 서슴없이 물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 TMI인데. 특히 회사 직원들의 호기심이 대단했다. 별생각 없이 동네를 말했다가 질문세례를 받았다. "어머, 강남?? 아파트야? 전세야? 자가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물음표. 난감했다.
예비 신랑에 대한 호구조사도 FAQ 중 하나였다. 한 부장님은 회사를 물으시더니 지인을 총동원해 평판조사까지 해 주셨다. 내 부탁이 아닌, 순도 100% 자발적인 의지로. "응, 내 친구가 거기 다녀. 알아봤더니 사람 괜찮대!" 그 동네를 잘 안다며, 집 위치를 그려보라던 분도 계셨다. 입사 이래 가장 큰 관심을 받았던 시절이다.
달갑지 않은 관심이 버거웠다. 결국 묘안을 짜냈다. 신혼집 근처엔 지하철 역이 3개 있었다. 그중 강남이 아닌 곳으로 대답하기. "OO역 근처예요."라고 하면 추가 질문 없이 끝났다. 열이면 열 모두 그랬다. 신기했다.
도배를 하고 새 살림을 들여놓으니 제법 안락한 공간이 되었다. 잠만 자던 살풍경한 곳이 환해졌다. 깔끔하게 청소하고 집밥도 해 먹고. 알뜰살뜰 살았다. 우리는 한식구이자 경제공동체, 인생이란 팀플을 함께 하는 든든한 파티원이었다. 매월 급여일마다 공동계좌에 이체한 후 잔고를 확인했다. 커져가는 숫자를 보며 두 번째 집에 대한 기대감도 키웠다. '라떼'도 신혼집은 단칸방에서 시작했다, 돈 모아서 살림 넓혀가는 재미도 쏠쏠하다던 인생 선배들의 말이 이런 걸까.
신혼부부가 나오는 드라마엔 집들이 장면이 꼭 등장한다. 친구나 직장 동료를 초대해 n회차로 여는 홈파티. 그건 번듯한 집을 가졌을 때나 가능하다는 걸 그때 알았다. 손님을 대여섯 명이라도 앉혀놓고 식사를 대접하려면 넓은 거실이 필요하다. 최소 30평은 되어야 나올 법한 규모. 좁은 집에서 집들이하는 모습은 미디어에서 본 적이 없다.
내 신혼집은 광범위하게 공개하기엔 부담스러웠다. 허물없이 지내는 절친은 예외였다. 스스럼없이 불렀으며, 자주 찾아왔다. 대학 시절 자취방을 서로 드나들던 사이라 격의가 없었다. 회사 사람이나 수영장에서 사귄 동네 언니는 초대하지 못했다. 집을 보여줄 수 있는지의 여부가 친밀함의 척도였다. 마치 리트머스 종이처럼.
옆집은 더 큰 평수였고 네 식구가 살았다. 부부와 두 아이. 방음이 취약한 벽을 통해 생활상이 전해졌다. 부모가 없을 때면 어린 형제는 자주 싸왔다. 매번 동생이 울고 끝났다. 서열 4위인 그 아이를 우리끼리는 '정이'라고 불렀다. 갑을병정의 네 번째 '정'. 어느 날 정이가 들뜬 목소리로 친구에게 전화했다. "우리 집에 놀러 와! 지금 엄마도 없고! 아빠도 없어!... 형도 없어!!" 정이는 그렇게 친구를 초대할 수 있었다. 가볍게 "놀러 와!"하고 외치던 때가 언제 적인지. 까마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