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st 5 minutes. 배리어 프리(Barrier Free : 시설물이나 서비스에서 물리적인 장애물이나 사회적인 차별 등의 장애요인이 없는 상태)의 필요성을 깨닫는 데 걸리는 시간! 유아차를 밀고 나가보면 곧 알게 된다. 익숙한 동네 길이 누군가에겐 거친 오프로드일 수 있음을.
도로 턱을 산성 넘듯
인도 경계석에 경사면이 없으면 난감하다. 바퀴가 큰 유아차는 살짝 기울여서 넘을 수 있다. 문제는 높이가 낮고 바퀴가 작은 휴대용 유모차다. 이 경우는 별 수 없다. 온 힘을 다해 번쩍 들어 올려야 한다. 계단 한 칸보다도 낮은 경계석이 대단한 장벽처럼 느껴진다.
큰맘 먹고 이용하는 대중교통
유소아 및 그 동반인은 대중교통에서 말하는 '대중'에서 배제된다. 6년 전 광화문역에 간 적이 있다. 지하철에서 내렸는데 계단만 있고, 에스컬레이터나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반대편에도 가 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아이는 유모차에서 잠이 들었고, 난감했다. 휠체어를 이동시키는 간이 리프트가 있었는데 사용하려면 직원을 호출해야 했다. 호출 버튼을 누르고 몇 분 기다리자 나타난 직원은 리프트가 고장이 났다고 했다. 결국 남편과 함께 유아차를 직접 옮겼다. 만약 나 혼자였다면 어땠을까?
유아차로는 에스컬레이터도 그림의 떡이다.
그래도 지하철은 버스보다 낫다. 저상버스가 아니면 계단 때문에 탑승이 힘들다. 요즘은 저상형이 많이 보급되었지만 7~8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드물었다. 계단 있는 버스는 아이가 최소한 3살 이상은 되어야 탈 수 있다. 버스 타기는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친다. 1. 버스 도착 전에 유아차를 미리 접는다. 2. 유아차를 한 손에 들고 다른 손으로 아이를 잡는다. 3. 유아차 및 아이와 함께 계단을 오른다.
이런 불편함 때문인지 버스에선 어린 아기와 엄마를 거의 볼 수 없다. 런던에 여행 갔을 때, 버스 승강장에 유아차가 많이 보여서 놀랐다. '유아차도 안 접고.. 어떻게 타려는 거지?' 버스가 도착하자 의문이 풀렸다. 문이 열리자 바닥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엄마들은 유아차를 접을 필요가 없다. 아기도 유아차에 누워 잠든 채 버스에 올랐다. 버스 내부엔 좌석 수를 줄이고 여유공간을 넓혔다. 유아차 서너 대가 주차하고도 공간이 여유로웠다.
문을 지나는 간단한 일조차 큰일이 된다.
건물 출입은 어떨까? 문 종류에 따라 난이도를 분류하자면, 자동 미닫이문 > 미닫이문 >>> 여닫이문 순이다. 회전문은 이용이 불가능하니 제외했다. 여닫이문은 타인의 배려가 필요하다. 유아 일행을 보고 문을 열어주는 친절한 분을 가끔 만나면 어찌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그런 운이 따르지 않는다면 이렇게 한다. 1. 유아차를 세운다. 2. 문을 열어 둔다. 3. 유아차로 돌아와 통과한다. 4. 유아차를 세운다. 5. 문을 닫는다. 당겨 여는 문이라면 유아차를 문에서 떨어진 곳에 세워야 해서 더 불편하다.
아이가 세 살일 때 샌프란시스코에 갔다. 쇼핑몰마다 대부분 여닫이문이라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런데 옆 벽에 버튼을 누르니 자동으로 문이 열리는 게 아닌가? 신세계였다. 그조차도 직접 누를 필요가 없었다. 유아차를 밀고 문에 접근하면 다른 사람이 대신 눌러주었다. 따뜻한 미소와 함께. 센서가 있어서 자동으로 열리는 문도 있었다. 맞은 편의 사람은 먼저 지나가지 않았다. 그들은 멈춰서 기다렸다. '우리 먼저 지나가라고 서 있는 거구나' 자주 경험할 수 없던 친절. 그곳에선 흔했다.
시민의식도 필요하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보자. 유아차로 통과하려고 문을 열면 그 사이로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라고 연 게 아닌데... 본의 아니게 도어맨이 되었다. 그들이 내 서비스?를 받고 빠져나간 후에야 이동할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탈 때도 마찬가지다. 유아차 앞으로 끼어들어 먼저 타는 무개념을 자주 보았다. 새치기가 이어지느라 승강기를 연속으로 두 번 놓친 적도 있다. 도와주는 건 언감생심이다. 차례나 좀 지켰으면 좋겠다. 시설이 갖춰져 있어도 시민의식이 뒤떨어지면 배리어 프리는 구현되지 않는다.
간사하게도 교통약자가 된 후에야 배리어 프리의 필요성을 깨달았다. 아이를 키우면서 전과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보게 되었다. 서는 위치가 달라지면 풍경도 바뀐다. 도시는 야생의 공간이 되었다. 간단한 외출에도 비장한 각오가 필요했다.
물론 운전을 하면 된다. 육아에 차는 필수다. 서글픈 현실이다. 운전이 싫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 이게 맞나? 차 없이도 얼마든지 다닐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런던의 엄마들처럼 유아차를 그대로 밀며 버스에 오르고 싶다. 타인의 호의에 기대지 않고도 불편함 없이 다니면 좋겠다. 이런 바람을 과연 희망사항으로만 남겨둬야 할까?
다시 보는 장애인 이동권 보장 요구
교통약자의 이동권 보장 시위를 생각해 본다. 장애인이 주축이 되어 나선 이 운동은 이른바 '대중교통 점거 시위', '지하철 운행 방해'로 기사가 나갔다. 출퇴근 시간에 타고 내리기를 반복하느라 불편을 준다는 비판도 컸다. 바쁜 시간에 꼭 이래야만 하는가. 시위가 일반 시민의 권리를 침해한다는 주장도 있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조용히 피켓만 들었다면 이슈화되지 않았을 것이다. 전장연은 20년째 시위해 왔지만 아직도 저상버스 보급률은 30%를 밑도는 수준이다.(2021년 기준) 심지어 장애인 이동보장을 위한 예산은 내년 예산안에서 제외되었다. 여론 조사 결과, 국민 절반 이상은 시위를 지지했다. 58.3%. 높은 수치는 아니다. 나머지 41.7%는 알까. 유아차나 휠체어나 같다는 걸. 노키즈 존 운운하는 이 사회에선 유소아의 이동권으로는 설득이 안 될 수 있겠다.
그렇다면, 갑작스럽게 부상을 당하거나 언젠가 노화로 거동이 불편해질 수 있다는 생각은 어떨까. 아니, 애초에, 나와 관계없는 상황이더라도 약자에 대한 배려심을 가질 순 없는 건지. 배리어 프리는 결국 시민의식의 문제일 지도 모른다. 압도적인 대다수가 이동권 시위를 지지한다면, 정책은 움직일 수밖에 없을 테니까. 물론, 정상적인 정부라는 가정하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