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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쓰니 Aug 15. 2023

반지하의 기억. 응답 없는 1988

사는 곳으로 구별 짓는 세상

 <응답하라 1988>의 덕선이네를 보며 유치원 시절 살았던 반지하 집이 생각났다. 드라마 속 집은 내가 살았던 집과 판박이였다. 서울의 어느 동네, 골목길에 늘어선 주택가, 그리고 같은 1988년. 단독주택의 주인집에 세 들어 사는 반지하 식구. 우리 가족도 한때 그렇게 살았다.


 집 구조가 상당히 특이했다. 문을 열면 시멘트 바닥의 주방이 먼저 나온다. 싱크대와 곤로, 수돗가가 있었다. 드라마를 보면 덕선이가 주방에 딸린 수돗가에서 상추를 씻는 장면이 나온다. 시골집 마당에 있을 법한 그런 수돗가다. 거기서 세수도 하고 머리도 감은 기억이 난다. 주방과 샤워실을 겸한 공간이었던 듯하다.


 방은 주방을 지나가야 나온다. 신발은 방에 들어갈 때에야 벗을 수 있다. 덕선이네처럼 우리 집도 방이 두 칸이었다. 부모님이 쓰시던 안방과 내 방. 그곳에서 2년을 살았다. 동생이 태어났고, 유치원 졸업을 앞둔 가을, 그 집을 떠났다.




 내 방엔 책상과 침대, 책장이 있었다. 당시 나는 유치원과 속셈학원과 미술학원에 다녔다. 부모님께서는 나를 부족함 없이 키우려 노력하셨다. 안방에는 없는 침대가 나 혼자 자는 방엔 있었다. 책장엔 할부로 들인 디즈니 명작동화를 비롯한 계몽사 전집이 가득했다.


 그래서였을까. 우리 집이 못 산다는 생각은 하나도 안 하고 살았다. 반지하라는 말도 몰랐다. 주인집에 사는 한 살 어린 여자아이 Y와 옆 집에 사는 친구 S를 만나기 전까지는.


 계단을 내려가야 나오는 우리 집과 달리 Y와 S의 집은 계단 위에 있었다. S의 집은 2층까지 있었고 내부 마감재는 모두 원목이었다. 벽도 천장도 온통 나무로 된 집. 반들반들한 갈색 마루를 지나 매끄러운 계단 난간을 손으로 쓸며 올라간 기억이 생생하다.


 그다음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생각나는 장면은 Y와 S가 소리를 지르며 비웃던 얼굴과 쾅 닫히던 문. 그 아이들은 나를 밀어내고 방문을 안에서 걸어 잠갔다. 굳게 닫힌 문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놀라고 서러워서 엉엉 울며 집으로 돌아왔다. 놀러 오라기에 갔는데 영문도 모르고 쫓겨났다. 그 애들이 왜 그랬는지는 그때도 지금도 모른다.


 Y는 몰라도 S는 나와 꽤 친했다. 아니, 친하다고 생각했다. S네 집 마당과 우리 집 사이엔 낮은 담벼락이 있었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조잘조잘 정답게 얘기하던 시간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S가 Y와 같은 편을 먹고 나를 따돌린 이유를 어린 마음에도 어렴풋이 눈치챌 수 있었다. 아니면 나중에 부모님께서 말씀하시는 걸 들었던가.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 그저 어린아이들의 변덕이었을 수도 있다.


 분명한 건 그 뒤로 Y나 S와 어울리는 일이 없었다는 거다. 당시엔 몰랐지만 그 사건은 빈부격차를 처음으로 인식한 계기였다. 다행히 동네 골목엔 같이 어울려 놀 수 있는 친구가 많았다. 후레쉬맨, 바이오맨 같은 비디오테이프를 빌려다 서로의 집에 가서 같이 보곤 했다. 인상 깊은 사건이 없어서였는지 그렇게 놀았던 친구들의 이름은 다 잊어버렸다. 30년이 지났는데도 성까지 또렷하게 외우고 있는 S와는 다르게. 아이러니한 일이다.




 한동안 반지하 시절을 잊고 살았다. 그 기억은 '휴거', '빌거'라는 말을 듣고 소환되었다. 나무위키에 따르면, '휴거'는 휴먼시아 브랜드가 생기며 원래 있던 '주거'(주공 아파트의 '주'다)를 대체한 말이다. '주거'는 1980년대부터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당시 나는 '주거'도 못되었다.


 반지하 주민의 지칭어는 없다. 나중에 영화 <기생충>이 나오며 열악한 주거 환경이나 재조명되었을 뿐이다. 건강한 사회라면 그런 용어가 따로 없는 게 정상이다. 낙인을 찍으려고 만든 용어니까. 가난이 혐오의 대상이 되고 차별의 이유가 되는 사회에 환멸이 난다.


 그때 나는 '임대'가 브랜드인 줄 알았다. 주공도 마찬가지. 정확한 의미를 알았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겠지만. 지방이라 빈부격차가 크지 않아서였는지, 나무위키가 틀렸는지는 몰라도 그 동네에서 '주거'라는 말은 없었다. 친구가 어디에 사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게 맞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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