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싼 값을 치르고 여행취향에 확신을 얻다
룩소르로 갈 크루즈는 이미 아스완에 며칠째 정박해 있는 상태라 이른 체크인이 가능했다. 감당 가능한 가격대의 크루즈라 지나오면서 본 다른 고급 크루즈들보다는 다소 낡고 로비가 단출한 느낌이 없지 않았지만 2박 3일간 숙박, 이동, 식사, 관광을 100달러에 한 번에 해결한다고 치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매 끼 뷔페로 제공되는 식사도 음식 가짓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나쁘지 않게 먹을만한 정도였다. 매 끼 나름 본전을 찾겠다고 요리에 디저트까지 평소보다 과식을 했고 동행은 이것 때문인지 전에 아스완에서 먹은 다른 음식 때문인지는 몰라도 다음날부터 앓아누웠다. 어차피 점심때는 햇살이 너무 뜨겁고 첫날은 배가 아스완에 정박해 있는 터라 어차피 창밖으로 나일강이 보이는 방에서 번역업무를 봤다. 해가 넘어갈 때쯤 데크로 올라가 이제는 익숙한 나일강의 일몰은 바라봤다. 크루즈에서는 어느 도시를 가든 강변에 나뒹구는 다량의 쓰레기를 보지 않아도 되어서 일몰을 온전히 즐길 수 있다. 몇 번을 봐도 붉게 물드는 나일강은 아름답지만 역시 이번에도 핸드폰 카메라는 이 색감을 담지 못한다.
크루즈는 자정 무렵 출발했다. 시동 거는 소리가 나름 커서 잠결에 느껴졌고 배의 규모와 나일강의 잔잔함 덕에 멀미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아침에 일어나니 첫 번째 정박지인 콤옴보 신전에 도착했다. 신전이 정박지 바로 앞이라 들어가 볼까도 고민했지만 워낙 보존상태가 좋지 않고 밖에서도 전체적인 형태는 대강 보여서 들어가지는 않았다. 결정적으로 딱히 흥미나 호기심이 없는 상태에서 입장료가 너무 아까웠다.
콤옴보를 떠나 에드푸까지 4-5시간 동안 이어지는 항해동안은 선미 쪽 데크에 앉아 풍경을 감상했다. 도시를 벗어나면 조용하고 평화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국토의 93%가 못 쓰는 땅이라고 하듯이 정말 강변 양쪽 몇십 미터를 벗어나면 바로 척박한 돌산이나 사막이 보였다. 그래도 중간중간 초목이 자라는 구역에서는 풀을 뜯고 있는 소떼들도 보였다. 가끔 배 위에서 막대기로 수면을 내리쳐 물고기를 기절시키는 방식으로 어업을 하는 현지인들의 모습도 보였다. 크루즈에 타서 이들을 관망하고 있으니 오묘한 기분이었다. 종속이론을 내 멋대로 변형해 적용해 보자면 주변부(periphery)에 이 어민들과 같이 현대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가장 이집트다운 모습으로 생업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있고 중심부(core)에는 관광업으로 돈을 버는 이집트인 사업가들이나 크루즈의 외국인들 옆에서 같이 주변부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부유한 이집트인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 사이 준주변부(semi-periphery)에는 관광업으로부터 떨어지는 떡고물을 노리는 사람들이 있다. 이를테면 카이로 호스텔에서 자국 화폐가 박살 나도 자기는 어차피 달러를 거래하는 직업이라 오히려 좋다던 직원이라든가 길에 가득한 삐끼들 말이다. 과연 이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서로를, 또 크루즈 안의 (그들 기준에서) 부유한 외국인들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까.
두 번째 정박지인 에드푸에서도 신전은 들르지 않고 바깥 매점에서 물이나 사면서 산책이나 할 겸 밖으로 나갔다. 이곳은 정박지에서 신전까지 거리가 꽤나 있어서 마차나 툭툭을 이용해야 하기 때문에 이미 배가 정박을 위해 속도를 늦추기 시작할 때부터 호객꾼들이 진을 치고 서있다. 호객꾼들 사이로 빠져나가려는데 몇백 미터를 끈질기게 쫓아오는 마차기사가 있었다. 계속 나는 정말 안 탈거라 당신을 위해서 다른 사람한테 붙는 게 좋을 거라고 얘기했지만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결국 안 탔으니 뭐 본인만 손해다. 당연히 바가지를 씌울 강변 쪽 매점을 피해 도시 안쪽으로 들어갔지만 날만 덥고 생각만큼 재미있는 모습은 펼쳐지지 않았다. 매점에서 큰 물을 집어 들어 시와에서 내던 가격인 5파운드를 내밀자 표정이 썩으며 10파운드를 달라고 한다. 얼마 되지도 않고 혹시 여기는 가격이 다를 수도 있으니 그냥 10파운드 주고 만다.
크루즈는 원래 예정 출항 시간보다 훨씬 늦게 에드푸를 떠나 룩소르 방향으로 항해를 계속했다. 오늘도 작정하고 일몰을 보려고 데크에 자리를 잡는다. 나에게는 이 날 일몰이 이집트 여행을 통틀어 가장 아름다웠다. 파란 하늘이 온통 주황빛으로 물들었다 달이 떠오르면서 낮과는 다른 색의 푸른색으로 칠해지는 한 시간 반 동안을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난간을 잡고 서있었다. 해가 지고 석식 후에는 크루즈가 댐에 도착해 갑문에서 수위를 조정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데크로 올라왔다. 사실 그렇게 대단한 구경거리는 아니었다. 크루즈에 탑승해 있던 독일인 그룹에 한국인이 한 분 계셨는데 이집트에 도착해 보니 독일 여행사에서 약속한 크루즈보다 등급이 훨씬 낮은 배를 배정해 줘서 그룹 전체가 화가 나 있는 상태라고 했다. 우리가 예약한 가격을 알려주니 본인들이 낸 금액은 후르가다와 크루즈 여행을 포함해서 3000유로 가까이 된다며 우리는 거저 탄 격이라고 했다.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다음 날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조식을 먹고 크루즈에서 체크아웃을 한 뒤 바로 룩소르 서안 투어에 합류했다. 룩소르의 서안은 주요 유적지가 애매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어서 개인적으로 택시를 빌리거나 투어를 예약하는 게 일반적이다. 호스텔을 통해서 인당 5달러에 별로 도움은 되지 않았지만 가이드까지 제공해 주는 투어를 미리 예약했다. 이집트나 남미같이 어쩔 수 없이 투어를 이용하게 되는 나라에서는 종종 호스텔이 투숙객들에게 거의 커미션을 받지 않고 투어를 연결해 준다. 숙소를 예약할 때 방 가격만 볼 게 아니라 오히려 여러 경로로 제공되는 투어 가격을 알아보는 게 돈을 아끼는데 굉장히 중요하다. 실제로 우리와 같은 그룹에 있던 한 여행객은 다른 에이전시를 통해 20달러가 넘는 가격으로 같은 투어를 예약했다고 했다.
첫 번째로 들른 멤논거상은 수치상 거대하긴 한데 이상하게 아부심벨에서처럼 딱히 크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원래 신전의 부분으로 파라오의 조각인데 그리스인들이 자기들 멋대로 본인들 신화에 나오는 멤논이라는 왕일 것 같다며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뒤쪽은 아직도 발굴 중이었고 딱히 인상적이지는 않았다. 다음으로 하트셉수트 장제전에 들렀다. 정말 간단하게 평하자면 멋있긴 한데 이제 신전은 딱히 감흥이 없다. 건물의 형체도 대부분 복원본이고 역사 설명도 크게 와닿지는 않았다. 오히려 가면서 나무위키에서 읽은 1997년에 이곳에서 있었던 테러 얘기가 훨씬 인상적이었는데 역시 가이드가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았다. 동행도 건물보다 오히려 뒤의 돌산이 더 신기하다고 했다. 안쪽으로 들어서면 상태가 좋지는 않지만 남아있는 조각상이나 벽화도 볼 수가 있는데 사람이 너무 많고 학생들이 사진 찍어달라고 달라붙는 탓에 뭘 찬찬히 감상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다. 우리는 카이로에서부터 한 번 시작하면 멈출 수 없을 것 같아 사진요청은 모조리 거절했다. 가끔 마음씨 약한 동양인 여자들이 몇 분씩이나 붙잡혀 몇십 명과 사진을 찍어주는 모습이 측은해 보였다. 상태가 좋거나 중요한 의미가 있는 벽화 앞에는 어떤 자격으로 있는지 모를 사람들이 막고 서있으면서 수금을 한다. 순진한 관광객들에게 안쪽 사진을 찍어주겠다며 카메라를 달라고 하고 사진을 찍은 이후에는 팁을 요구하는 전형적인 수법이다. 본인들이 접수한 구역 옆에는 가이드들에게 이 부분은 설명하지 말아 달라는 부탁을 적은 A4용지도 대놓고 붙여놓는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이고 15000원씩 입장료를 받아 챙기는 유적지임에도 현지 경찰이나 담당자들은 관리를 안 하는지 못 하는지 저런 사람들이 활개를 치고 다닌다. 워낙 정신도 없고 가이드가 25분 만에 나오라고 재촉해서 대충 둘러보고 나오니 15000원 입장료가 그렇게 아깝게 느껴질 수가 없다. 다음은 역시 투어 하면 빠질 수 없는 끼워 팔기 시간이다. 근처 돌 공예품들을 파는 가게에 들러 하트셉수트에서 보낸 시간보다 더 오래 머무른다. 다들 웰컴티를 받아 마시고 화장실을 무료로 이용하지만 당연히 기념품은 사지 않는다. 이런 부분이 투어를 되도록이면 피하고 싶게 만든다.
세 번째로 서안투어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는 왕가의 계곡에 입장한다. 고대의 왕들이 권력 과시를 위해 거대한 피라미드를 무덤으로 사용해 도굴의 표적이 되는 걸 보고 후대의 왕들은 룩소르 서안 지하에 무덤들을 숨겨놓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 무덤들도 유명한 투탕카멘의 무덤을 제외하고는 결국에는 다 털렸다는 사실이 아이러니다. 왕가의 계곡의 현재 입장료는 약 25000원 정도 한다. 게다가 대부분의 유적지에서는 카드결제만 가능하기에 암환율로 바꾼 파운드를 쓸 수도 없다. 그런데 이런 입장료에도 불구하고 3군데의 무덤만 들어가 볼 수 있고 그마저도 보존상태가 가장 좋은 무덤들은 별도의 티켓을 구매해야 한다. 표를 사고 입장하면 길이 꽤 언덕을 올라가야 할 것처럼 생겼고 전기카트로 탑승 티켓을 20파운드에 별도로 샀다. 가이드가 은근 유도하는 것도 있었고 날도 더운데 길이 길 것 같아 투어 그룹 모두가 티켓을 샀다. 하지만 걸어야 하는 길은 모퉁이를 돌면 바로 끝나는 정도라 3분이 채 걸리지 않을 것 같은 거리였다. 전기차 티켓이 큰돈은 아니지만 뭔가 구매유도를 위해 길을 꺾어놨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첫 번째로 들어간 람세스 4세의 무덤은 꽤나 신기했다. 생각보다 벽에 그려진 상형문자나 묘실 벽과 천장의 색깔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재미있는 점은 벽화 등장인물들의 얼굴이 거의 모두 도려내져 있는데 예전에 콥트교도들이 기독교가 로마에 의해 박해받을 때 이곳을 교회로 쓰며 훼손한 결과라고 한다. 이후에 들어간 람세스 9세와 메렌프타의 무덤은 규모도 작고 첫 무덤과 크게 다르지 않아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았다. 그 와중에 가이드는 무덤당 10분 안에 찍고 오라며 또 재촉을 한다. 아무리 신기하고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다고 해도 25000원을 내고 들어갈 유적지는 아니었다.
유적지 사이를 이동하면서 차 밖으로는 길가에 그냥 방치되어 있는 다른 유적들이 끊임없이 보인다. 마지막 스팟이었던 아문신전은 도저히 흥미가 생기지 않아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기다렸고 나중에 투어그룹의 다른 사람들이 가장 흥미로웠다고는 했지만 아쉽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이후 상당히 맛이 없었던 점심뷔페를 먹고 숙소에 복귀하며 투어를 마무리했다. 투어차량에서 내려주고는 기사와 가이드 팁은 따로 요구했다. 룩소르 서안 투어는 개인적으로는 쿠스코에서 성스러운 계곡 투어에 버금갈 정도로 굉장히 실망스러웠다. 비싼 입장료를 치르고 이제는 확실히 남들이 다 간다고 해서 관심 없는 유적에 갈 이유가 단 하나도 없다는 교훈을 재확인했다.
다음날은 룩소르->카이로, 카이로->다합의 연속되는 장거리 버스 탑승이 예정되어 있었다. 오전에 시간이 비기도 하고 룩소르에서 매우 저렴하게 열기구 투어가 가능해 인당 45달러를 투자해 예약을 했다. 일출을 보기 위해서 새벽 4시 30분부터 준비해서 픽업차량, 보트, 다시 차량을 이용해 열기구 탑승 지점에 도착했다. 사방이 뻥 뚫려 있어 처음에는 다소 무서웠지만 워낙 천천히 올라가고 안정감이 있어 나중에는 풍경을 즐길 수 있었다. 높이 올라가니 전날 봤던 장제전과 멤논거상을 비롯해 룩소르의 논밭과 계곡, 나일강, 그리고 조금 시간이 지나고는 일출까지 꽤나 괜찮은 파노라마 뷰가 펼쳐졌다. 또 하늘에서는 이집트의 혼란에서 벗어나 열기구 연료 소리를 제외하고는 고요한 상태에서 매력적인 경치를 볼 수 있다는 게 큰 장점으로 다가왔다. 카파도키아나 다른 유명한 여행지에서는 20만 원 가까이하는 투어를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한 번 정도는 해 볼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격이 비싼 것도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닌 게 조종사를 제외하고도 지상인력이 한 기구당 10명 정도씩 붙어서 이착륙 과정과 뒷정리를 도왔다. 30여 분 간의 비행이 끝나고 지상으로 내려오자 다시 익숙한 이집트가 펼쳐졌다. 투어사의 노골적인 팁 요구, 동네 아이들의 앵벌이, 아무 의미 없는 시끄러운 경적소리들. 45달러 정도는 내야 고요를 즐길 수 있는 나라인가 보다.
숙소에서 와이파이가 작동하지 않아 로비에 앉아있는데 옆에 동양인 아저씨가 중국말로 말을 건다. 알고 보니 은퇴한 대만인 교수라는데 내가 한국사람이라니까 너는 중국사람처럼 생겼다고 확인사살을 해 준다. 이제 놀랍지도 않다. 그래도 이 분과 한참 떠들면서 아침도 얻어먹었다.
카이로로 가는 버스에 짐을 싣는데 당당히 짐 당 25파운드씩을 요구한다. 보통 현지인 남자들에게도 팁 요구는 하지만 (여자들에게는 팁을 요구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짐에 25파운드는 말도 안 되는 가격이다. 원래 버스티켓에 짐값도 다 포함되어 있어 아무리 현지인들이 준다고 해도 팁을 줄 의무는 없다. 기분이 확 상해서 돈을 주지 않고 버티고 서 있으니 다른 현지인들에게도 돈을 받는 척하면서 몰래 다시 돌려주고 계속 내 눈치를 슬슬 본다. 지겨워서 그냥 25파운드 주고 짐 싣고 탑승했다. 다른 나라 같으면 현지인들이 나서서 바가지를 씌우는 사람에게 뭐라 할 법도 한데 여기는 그런 것도 없다. 그 모범적이라는 이슬람교의 교리는 자기들 내부에서만 적용되고 외국인들은 기본적으로 등쳐먹어도 되는 존재로 인식하나 보다. 밤에 카이로에서 다합으로 가는 버스에서도 당당히 '유 기브미 텐'을 외친다. 25를 겪고 나니 10 정도는 더 사기 안쳐줘서 감사하다는 마음으로 기꺼이 적선한다. 군대에서 한국인들에 대한 나이브한 희망을 버렸다면 이집트는 개발도상국 사람들의 국민성과 무슬림의 도덕성에 대해 회의를 느끼게 한다. 물론 성급한 일반화이지만 점점 무슬림들이 기독교를 욕 할 명분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차라리 기독교인들처럼 대놓고 천박하고 돈을 밝히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이렇게 세상은 이상주의자들을 찌들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