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편소설_1(키워드: 전등, 섬광)
노트북 불빛에 의지해 글쓰기에 여념이 없던 수현은 문득 자신의 뒷목이 뻐근함을 느꼈다. 팽팽한 집중이 한 차례 깨지니 허리, 어깨, 손목 통증과 허기가 몰려왔다. 책상에 오래 앉아 있었다면 으레 한두 시간에 한 번쯤은 몸을 펴 주는 게 좋기도 하거니와, 뭐라도 먹는 게 좋을 것 같아 조금 쉬어야 할 성싶었다. 휴대폰 배달 어플을 뒤적거리며 대충 햄버거를 주문한 뒤, 수현은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구나. 어두워져서야 오늘이 지나버렸음을 알게 되는 거야. 자퇴 후 방에만 있다 보니 시간 감각이 갈수록 사라지는 것 같았다. 수현은 어둠이 익은 눈으로 방 안에 널브러진 각종 잡동사니를 건너 다니며 익숙하게 전등 스위치를 눌렀다. 저도 모르게 전등 쪽으로 고개를 돌린 수현의 눈은 순간적으로 터지듯 켜진 불빛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강렬하게 다가온 빛은 수현의 눈을 시리게 했다. 아아, 수현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고 그 위에 손바닥을 대 보았다. 감은 눈 안에서 무언가 기어 다니는 것만 같이 꿈틀거렸다. 손바닥으로 눈을 가린 몇 초간 수현은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는데 하나는 이대로 계속 눈을 감고 있고 싶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지금 무척 울고 싶다는 것이었다.
수현은 방 안에서 내내 동화를 쓰고 있었다. 어두운 동굴 세상에 사는 외로운 소녀가 빛의 요정 키키와 친구가 되어 행복을 거머쥐는 이야기였다. 사실 그 이야기는 초보적인 작가들이 그러하듯 상당 부분 자신이 투영되었고, 주변이 반영되었고, 그리하여 인물과 전개는 현실의 사건에 지지부진하게 끌려갔다. 어영부영 진행되던 이야기는 이제 결말부, 수현은 소녀에게 결말을 주어야 했다. 그런데 어떠한 결말을? 어느 순간부터 소녀는 수현이었고 그래서 소녀의 결말은 곧 수현의 결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래서 수현의 결말은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말도 없이 버려진 우정? 망가져 버린 학교생활? 이제 배달이 완료되었습니다, 외에 울릴 일 없는 휴대폰? 그런 결말을 소녀에게 줘도 되는 걸까?
도착한 햄버거의 포장지를 벗기며 수현은 윤에 대해 생각했다. 윤은 친구 없이 혼자이던 수현과 밥을 먹어주었고, 체육 시간에 짝을 지어 주었고, 우스갯소리에 함께 웃어주었는데. 전등불처럼 은은히 퍼진 온기에 수현이 방심했던 거다. 윤은 수현에게 말도 없이 전학을 갔고, 아이들은 혼자인 사람을 귀신같이 알아보고 배척했다. 세상은 너무 어둡다. 그렇다면 윤은 무엇이었던 걸까. 왜 빛이 있었다는 걸 알려준 거야? 금방 점멸할 불빛이었으면서? 수현은 평생 그 빛의 번쩍임을 잊지 못한 채로 한기를 느낄 것이었다. 성냥팔이 소녀가 성냥에서 환상을 보았듯 윤과의 추억을 반추하면서.
포장 쓰레기를 대충 옆으로 밀어 치운 수현은 다시 자리에 앉아 글을 잇기 시작했다. 윤과의 기억을 떠올리니 글을 더더욱 감정적으로 쓰게 되는 것 같았다.
차라리 빛이 있다는 알려주지 말지 그랬어. 차라리 어두운 동굴만을 알게 하지 그랬어. 그러면 어둠이 이렇게 고통스럽지 않았을 거야.
수현도 알았다. 이건 내 목소리지. 소녀의 목소리가 아니라. 인물의 목소리를 대리인 삼아 계속, 계속 말을 써 내려갔다. 쓰다 보니 수현은 알 수 있었다. 수현은 아직 이 마음의 결말을 내지 못했다. 결말을 낼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주해야 하니까. 자신의 마음이, 실은, 사실은. 수현은 마음이 벅차 돌연 타자 치던 것을 멈췄다.
그 순간 수현이 써 내려간 말을 제 말처럼 쏟아내던 소녀도 문서 창에서 수현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수현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이었다.
- 넌, 그래서 그 시간이 어땠어?
인물이 멋대로 움직여 말을 거는 비현실적인 현상에 수현의 얼굴에 순간 당혹감이 스쳤지만, 질문이 머리에 입력되자 곧장 출력되는 윤에 대한 감정이 그 모든 걸 뛰어넘었다. 수현에게 있어 윤과의 시간, 그것의 의미. 그건 정말 생각하기 싫었던 부분이었다. 수현은, 실은 정말 사랑했다. 편식하는 피망을 대신 먹어주던 윤을, 실력 차가 많이 나는데도 불평 없이 배드민턴을 가르쳐주던 윤을, 아버지에게 배운 듯한 재미없는 아재 개그를 즐기던 윤과의 시간을, 그 반짝임을 수현은 너무도 사랑했다. 그래서 그 시간이 하나도 소중하지 않았다는 듯 말도 없이 떠난 윤을 용서할 수 없었다. 수현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몸을 들썩이며 흐느꼈다. 진심인지도 몰랐던 마음이 흘러나오기 시작하니 울음이 멈추지 않았다. 소녀는 그런 수현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계속, 계속 쳐다보았다. 소녀는 곧 수현이었기에 말하지 않아도 모든 걸 알 수 있었다. 수현과 소녀는 빛을 본 적이 있었다. 그 따뜻함을 느낀 적이 있었다. 섬광처럼 지나간 따뜻함을 잊을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럼 어떻게 이제 해야 할까. 수현은 정말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눈앞의 소녀에게 어떤 전개를 줘야 할지도. 세상은 무섭고 방 밖의 사람들은 다 자신을 싫어하는 것만 같다. 윤과 있을 때 수현은 자신이 꽤 괜찮은 사람이 된 것 같다고 느꼈다. 윤은 항상 자신의 좋은 점을 말해주었으니까. 수현이 너는 목소리가 좋아. 가수를 하는 건 어때? 그림을 잘 그리니 동화 작가를 하는 것도 좋겠다. 너랑 드라마 얘기하는 거 재밌다. 그래서 수현은 이제 자신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던 거다. 윤이 사라진 수현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냥 윤이 없었던 예전으로, 원래대로 돌아간 것뿐인데 이전과는 다른 고독감이 견딜 수 없게 사무쳤다.
우는 일에도 체력이 필요한 탓에 수현의 흐느낌이 어느덧 잦아들었다. 수현은 다시 노트북을 보았고 소녀를 보았다. 소녀는 수현 못지않게 침울해 보였다. 하지만 수현을 보자 뭔가 말하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리고 결심한 듯 표정을 굳히고 수현에게 말을 걸었다.
- 나, 내 이야기를 해도 될까?
수현 본인이 작가일 터인데 작가에게 더 설명할 부분이 남아있을까. 수현의 눈에 담긴 의뭉스러움에 소녀가 부연했다.
- 난 너에게서 독립된 인물이잖아. 네 성격을 빼닮았어도 스스로 생각하고 의지를 가지고 움직일 수 있지. 모든 게 네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믿을 수 없지만, 한편으로는 일리 있는 말이었다. 수현은 자세를 고쳐 앉고 새로운 문서 창을 열었다. 그리고 그곳에 새로운 소녀의 이야기를 받아 적기 시작했다.
- 키키는 어느 날 나타나서 내게 빛을 가르쳐 주었지. 그전에는 어둠에 익숙해서 그런 빛이 있는지도 알지 못해서, 키키가 알려주는 모든 게 새롭고 즐거웠어. 그렇게 한동안 동굴을 밝게 비춰주던 키키가 갑자기 사라지니까, 모든 게 힘들고 또 외로웠어. 갑자기 어둠에 적응해야 했고, 또 키키가 보고 싶었으니까. 여기까지는 너도 아는 이야기겠지.
- 하지만 말이야. 동굴 곳곳에는 아직 키키의 흔적이 있어. 키키가 촛농을 녹여 붙여준 선반이 있고, 키키가 나눠 준 마법 가루가 있고,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있어. 키키를 알게 된 내가 있어. 그 추억을 소중하게 여기는 내가 있어.
- 난 이제 키키에게 배운 빛의 따뜻함을 알아. 그리고 그건 사라지지 않아.
그건 사라지지 않아. 그 문장을 쓰는데 수현은 다시 조금 복받쳤다. 윤은 사라졌어도, 다시 만나지 못하더라도, 함께했던 시간은 너무도 즐거웠고 그건 거짓이 아니다. 그리고 그 시간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 모든 걸 사랑한다. 아마 영원히 그럴 것이다. 그리고 그만큼 윤을 미워했지만 미워하고 싶지 않았다. 그 마음을 인정하니 수현은 뭔가 마음속 꼬인 실타래가 풀린 느낌이 들었다.
- 그리고 내 생각엔 말이야, 난 이미 한번 강한 빛을 본 적이 있잖아. 그러니까 다음에도 그 빛을 만나면 분명히 알아볼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그 빛을 따라갈 거야.
정말 그럴까? 소녀는 다시 빛을 따라가게 될까? 다시 그 빛이 너를 배신한다고 해도 그럴 거야? 아프게 상처 준다고 해도? 섬광처럼 지나가 버릴 그 무엇이라고 해도?
- 응, 도망가지 않게 꼭 껴안아 줄 거야. 그러면 언젠가 나도…….
수현은 정말 믿을 수 없었다. 소녀가 이렇게나 단단하다니. 나약한 자신에게서 나온 인물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하고 멋진 소녀. 나도 언젠가 이렇게 단단해질 수 있을까? 수현의 물음에 응, 하고 소녀는 단언했다. 나는 너니까. 네 안에 내가 있으니까.
*
너무 울었더니 수현의 머리가 띵하게 아팠다. 바람이 쐬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수현은 오랜만에 집 밖을 나서보았다. 흩날리는 나무, 스치는 바람, 풀 내음, 많은 것들이 기억 이상으로 좋았는데 무엇보다 좋았던 건 어둑한 하늘과 거기에 박혀있는 몇 안 되는 빛나는 별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