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얼마나 행복한가는
그의 감사의 깊이에 달려있다.
- 존 밀러-
일기를 써온 지 올해로 약 10년쯤 된다. 매일 꾸준히 쓴 건 아니었지만, 기억하고 싶은 특정한 사건이 있거나 생각을 정리하고 싶을 때, 누군가를 실컷 욕하고 싶을 때 일기장을 꺼내 그날의 감정을 적곤 했다.
좋은 날은 또박또박한 바른 글씨체로, 남편과 싸우거나 심기가 불편한 날에는 같은 사람이 쓴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엉망인 글씨체로 썼다. 그러다 보니 일기장의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아도, 까만 글씨만으로도 충분히 그날의 기분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일기를 쓰는 동기는 '사건'이었다. 뇌리에 박힐만한 큰 사건들 위주로 적다 보니, 소소한 일상들은 기록되지 않고 스킵되기 일쑤였다. 그러다 보니 여러 날이 모인 일기장엔 또박또박한 글씨로 쓴 장보다, 휘갈겨 쓴 장들이 훨씬 더 많았다. 중간중간엔 종이가 찢긴 부분도 있었고, 눈물로 글씨가 번진 부분도 보였다.
처음엔 일기의 역할이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부정적 감정을 글을 씀으로써 해소하는 것. 쓰임을 다했으니 괜찮다 싶었다. 하지만 막상 노트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다 쓰고 나니, 그 노트가 그리 소중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일기장은 언제든지 꺼내 먹고 싶은 달콤한 초콜릿 상자여야 하는데, 내 일기장은 다신 열어보고 싶지 않은 오물로 가득한 감정 쓰레기통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걸 기억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는데 말이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 지난날 자신에게 발생한 모든 일들을 다 기억할 수가 없다. 그저 좋았던 날을 더 많이 기억하면 좋은 인생인 거고, 나쁜 일을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살면 나쁜 인생이 되는 것이었다.
그런 걸 보면 인생은 우리 스스로 편집한 작품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인생이 행복하고, 애틋하기를 바란다면 그저 즐겁고, 행복하고, 감사한 날들을 더 오래 기억하고, 슬프고, 절망스럽고, 화나는 일들을 지우면 되는 거였다.
일기를 10년 정도 쓰고 보니, 일기는 감정을 해소하는 도구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일기가 인생을 바꾸는 무기가 되기 위해선 안 좋은 일보단 좋은 날을 더 많이 기록하고, 사건보단 평범한 일상의 행복을 남기는 공간이 돼야 했다. 그래야 나중에 우리의 삶이 힘들고 지칠 때, 일기장이 우리를 위로하고, 일으켜 세워주는 초콜릿 상자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지나고 보니 미래의 날 지탱해 주는 건 과거의 나고, 과거의 나는 일기장 안에 있었다.
그래서 지난 11월 한 달간 감사일기를 써봤다.
처음엔 '감사일기 쓴다고 뭐가 달라지겠어?'라는 반신반의한 마음이 더 컸다. 하지만 지난날과는 다른 스타일로 일기를 쓰고 싶었고, 감사일기가 사건 위주가 아닌 매일의 평범한 하루를 쓴다는 점, 엉망인 하루 안에서도 의도적으로 감사함을 찾는 긍정이 있는 점에 끌려서 한 달만 써보기로 했다.
그런데 한 달도 채 되지 않아서 난 내 삶의 변화를 느끼기 시작했다.
첫 번째 가장 큰 변화는 주변의 다정함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거였다. 일기는 내 감정에 몰두되어 글을 쓰니 주변보단 내 안의 감정을 더 크게 들여다보는 경향이 있었는데, 감사일기는 오늘 하루의 감사함을 찾아 쓰는 거다 보니 내 주위의 사람들이 먼저 보이기 시작했다.
매일 아침 출근으로 바쁠 텐데도, 우렁각시처럼 내가 일어나기 전에 설거지를 해주고 가는 남편의 묵직한 사랑이 보였고,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아이들의 사랑스러운 모습이 보였다. 예전 같으면 순간의 감사함만 느끼고 잊히거나, 똑같은 날들 중 하루라고 생각하며 의식하지 못하고 지나갔을 날들이었을 텐데, 매일 감사해하며 기록으로 남기다 보니, 하루하루가 모두 선물처럼 느껴졌다.
두 번째 변화는 전보다 더 자주 '행복하다'는 감정을 느꼈다는 거다. 지난 한 달 동안 일기장에 가장 많이 쓴 말을 꼽자면 바로 "행복하다"였다. 일기장을 살펴보니 '행복'이라는 단어를 언급한 날이 30일 중 무려 열여덟 번이나 됐다.
<유퀴즈 온 더 블록>이라는 프로그램을 보니, 행복교수로 유명한 서은국 교수는 사람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자신과 긍정적으로 소통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긍정적 내면 소통의 6요소로 '용서, 연민, 사랑, 수용, 감사, 존중'을 언급했다. 역시 감사와 행복은 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었고, 내가 느낀 행복의 감정도 단순한 기분 탓이 아닌, 과학적으로 근거 있는 변화라는 사실을 확인받으니 내심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세 번째 놀라운 변화는 감사함을 쓰다 보니, 새로운 감사함이 계속 생겨난다는 거였다. 감사일기를 쓰기 전에는 매일 새로이 감사할 게 뭐가 있나 싶었다. 한 달 중 반은 감사한 일이 있다 치더라도, 나머지 반은 전의 일들을 재탕하는 거 아닌가 했다.
그런데 감사일기를 쓰면 쓸수록 감사한 일들이 하나 둘 더 늘어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하루에 딱 3가지 쓰기로 한 감사일기가 나중엔 일기장 한 면을 가득 채워도 모자라 뒷장으로 넘겨서 쓰는 날도 많았다. 감사함은 습관이었다. 습관적으로 감사함을 찾다 보니, 세상에 감사하지 않은 일이 없었다.
네 번째 변화, 아니 깨달음은 우리 인생에 안 좋은 날은 단 하루도 없다는 거였다. 솔직히 한 달간 항상 좋은 일들만 가득했던 건 아니었다. 기대했던 일이 좌절되는 날도 꽤 있었다. 하지만 그럴 때도 그 속에서도 감사함을 찾으려 했고, 찾기 힘들면 그 일들을 통해 배운 점을 쓰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신기하게도 안 좋은 날도 꽤 괜찮은 하루가 되어 있었다.
예전엔 감사일기가 억지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냥 느끼는 대로 쓰면 되지, 굳이 감사함을 찾아서 써 내려가는 게 인위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해보니 억지스럽다고 나쁜 건 아니었다. 힘든 상황 속에서도 의도적으로 감사함을 찾는 습관은, 인생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플러스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서도 삶이 힘들고 여유 없게 느껴지는 분이 계시다면, 또는 내년에 만들 새로운 루틴을 고민한다면 주저 없이 '감사일기' 쓰는 것을 적극 추천해주고 싶다.
저와 함께 2025년을 감사함으로 꽉꽉 채워보는 거 어떠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