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학 공론장 <월간 틀> 11월호 기고
가끔은 이런 생각을 해본다. 기자라는 직업에 자격증이 있다면 어떨까. 언론인이 되려면 이른바 ‘언론 고시’를 통과해야 한다. 하지만 전문가로서의 자격을 부여하는 다른 고시와는 다르게 언론인에게는 자격증이 없다. 언론은 자유로워야 하고 표현의 자유는 국민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권리이므로 특정 주체가 검정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기자는 자격증이 필요 없는 직업이다. 하지만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작지 않기에 윤리, 도덕, 정직, 양심, 청렴 등 최소한의 자격을 지녀야 한다.
하지만 작금의 언론에는 최소한의 자격도 갖추지 못한 자들이 넘쳐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언론의 자유는 고귀하다. 미국에서는 무려 수정헌법 1조에서 보장하는 자유민주주의 최고의 가치다. 때문에 언론은 어떤 외압에도 굴복하지 않도록 꼿꼿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는 ‘언론’의 자유다. ‘언론인’의 자유가 아니다. 언론인 중에는 둘을 혼동하여 부여되지 않은 자유를 휘두르는 부류가 있다. 이들이 모여 무절제한 방임으로 치닫는 공간이 기자들의 사회다. 그들만의 리그는 전체 사회의 주목을 받지 못한 채 고인 물이 되어 악취를 내고 있다. 이는 비단 개별 언론사의 무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언론을 가지지 못한 사회 전체의 경쟁력 저하로 귀결된다.
이 글을 쓰는 나는 일간지에 입사한 지 반년 만에 기자를 그만뒀다. 어렵게 가지게 된 직업이지만 버린 것을 후회하진 않는다. 또한 이 글이 내가 떠난 세계에 대한 무차별적인 비난이 아니라는 점도 확실히 한다. 기자를 다시 하고 싶지 않지만, 그렇다고 언론에 대한 애정을 버린 것은 아니다. 앞으로도 언론의 행보를 예의 주시할 것이고, 더 나은 언론을 위해 간접적인 활동을 이어갈 것이다. 이 글은 그 활동의 시작이자 일부다.
언론인의 문화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 중 하나는 선후배 문화다. 흔히 떠올리는 그 선후배 문화가 맞다. 다만 언론에서의 선후배 문화가 일반의 그것과 다른 점은, 호칭에 있다. 언론인은 선배를 ‘선배님'이라 부르지 않는다. 선배는 그저 선배일 뿐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더 나아가, 부장님은 부장이고 국장님도 국장이다. 설마 사장과 회장도? 그렇다. 그들도 예외가 아니다. 이런 문화의 배경에는 전해오는 이야기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국어적 측면의 이유다. 이미 존대의 의미가 있는 말에 굳이 접미사 ‘-님'을 붙이면 중복된다는 주장이다. 예를 들어 직급을 나타내는 ‘사장'에서 ‘장(長)'은 [길 장/어른 장]이다. 접두사로 붙는 조직이나 단체의 어른이라는 의미가 되기에 자체로 존대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때문에 ‘-님'을 붙이면 의미 중복이 된다는 것이다. 이 해석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일례로 내가 몸 담았던 회사의 비언론인 출신 회장은 이 의견을 반박하며, 스스로 ‘회장'이라 불리는 것을 극도로 꺼려했다. 선생님을 선생으로 부르지 않는 이유가 있다는 식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다른 하나의 이유는 소름 돋게 멋있다. 기자는 권력을 감시한다. 그것이 본령이다. 그래서 권력자를 앞에 두고도 위축되면 안 된다며 ‘맞먹는' 연습을 시켰다. 사내에서부터 상급자에게 위축되지 말라는 뜻에서 선배님을 ‘선배'라고 부르게 했다. 평소에 높은 사람을 존대하지 않으면서 권력에 짓눌리지 않으려는 기자들의 노력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명분과 타당성을 모두 갖췄기 때문에 반박의 여지가 적다. 기자 시험을 준비하던 시절 나의 눈에는 이 모습이 참 바람직해 보였다. 존경할 어른을 찾기 힘든 세상에서 맹목적 장유유서에 피로감을 느끼던 나에게는, 이를 거스르는 것을 직업의 본질로 하는 ‘기자'가 정말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언론의 선후배 문화는 멋진 본의가 무색할 정도로 부작용을 양산한다. 언론의 선후배 문화는 모든 언론 내 대인관계를 선배와 후배로 구분한다. 그 과정에서 ‘기수 문화'가 공고하게 자리 잡는다. 정기적으로 시행되는 공채를 통해 입사한 사람들에게 순차적으로 ‘기수'가 부여된다. 이는 퇴사, 아니 언론인으로 남아있는 한평생 따라다니는 꼬리표가 된다. 경력 채용으로 다른 회사에 들어간다고 해도 최초 언론사 입사 연도를 계산해 새로운 회사에서의 기수 체계에 편입된다. 뉴스에서 종종 비판하던 대학 등 단체에서의 기수 문화가 언론에는 버젓이 남아 있는 것이다. 나보다 낮은 기수의 사람에겐 초면에도 반말을 내뱉어야만 하는 이상한 문화도 있다. 실제, 내가 속했던 회사에서는 후배를 존대하는 것이 ‘금지’돼 있었다.
상급자를 ‘선배’라고 부르는 과정에서 무의식 중에 형성 및 인지되는 상하 관계는 기자들에게 사내 발언의 자유를 제한한다. 선배의 말은 복종의 대상이고 선배의 꾸짖음은 두려움의 대상이다. 선배의 의견과 후배의 의견이 대립할 경우 전자에 무게가 실리는 것이 생리다. 이는 ‘데스킹’이라는 작업에서 가장 단적으로 나타난다. 데스킹은 언론사의 데스크들이 보도할 뉴스를 선택하고 편집하는 작업을 일컫는다. 이른바 게이트 키핑의 일환이다. 나와 같은 해에 입사한 기자 친구들이 가장 많은 고충을 토로하는 부분이 여기이기도 하다. 기자들이 작성한 기사를 데스킹 하는 과정에서 데스크들은 폭언을 일삼는다. “기사를 이 따위로 썼느냐”, “기자의 자질이 없다”는 식이다. 욕설은 덤이다. 결국 기사는 데스크의 취향에 맞춰 변형된다. 이런 환경에서 언론 보도는 상급자의 취향으로 수렴하기 쉽고, 사내 다양성을 포섭하지 못하는 언론 활동은 편향된다.
언론은 표현의 자유를 먹고사는 집단이다. 표현의 자유가 무엇인가. 구성원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하게 의견을 낼 수 있는 것이 표현의 자유이고, 다양한 의견들이 대립하고 충돌하면서 가장 적합한 안으로 수렴해가는 것이 민주주의의 작동 원리 아닌가. 그런 언론이, 가장 민주적으로 이뤄져야 할 언론 활동이 내부에서는 가장 폭력적이고 독재적인 방식으로 이뤄진다. 토론은 없고 소통은 경직된다. 오늘날 한국 언론이 각자의 정치적/사회적/경제적 이익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보도하고 있는 현실은 내부의 비민주적 소통 환경이 주원인이라고 나는 본다. 언론이 언론답기 위해선 집단으로서 언론의 자유를 부르짖기 전에, 언론 내부의 자유를 개척해야 한다.
기자 지망생들은 대개 생각과 주장이 명확하다. 생각이 분명하고 주장이 강해서 기자를 지망하는 건지, 그 반대인지는 모르겠다. 그들은 매일 신문을 읽고 뉴스를 보며 사안에 대한 자기 생각을 글로 정리하고 토론하며, 기성 언론의 보도 자체를 비평하기도 한다. 기자 지망생들이 모여 운영되는 스터디에서는 매우 높은 수준의 토론이 진행되기도 한다. 방송에서 가끔 접하게 되는 국회의원 등의 수준 미달 토론에 비해 월등하다고 본다. 개별 사회 어젠다뿐만 아니라 자유, 평등, 민주주의와 정의 등 거대한 담론까지 자유자재다. 이런 그들이 모이고 모여 형성된 것이 언론인데, 어찌 언론 내부에서는 발언의 자유를 향유하지 못하는 것일까.
나는 그 원인을 기자 교육에서 찾는다. 언론사가 신입 기자를 교육하는 방식은 철저하게 ‘구질서 적응’에 맞춰져 있다. 이 방식은 철저하게 반인권적이고 폭력적이며 불합리하고 시대착오적이다. 이런 일련의 교육을 거치며 신입 기자는 입사 전의 맑은 비판 정신을 잃는다. 신입기자가 지켜야 할 몇몇의 규칙들은 이를 아주 극명하게 보여준다. 드라마 ‘피노키오’에 나오기도 하는 “내 전화는 벨이 세 번 울리기 전에 받아”라는 대사, 실제로도 이렇다. 전화벨이 세 번 이상 울리도록 전화를 받지 않는 건 신입 기자 규정 위반이다. 또한 신입 기자들은 반드시 택시를 타야 한다. 대중교통은 금지다. 수십, 수백만 원의 택시비는 스스로 부담해야 한다. 이유는 나 역시 지금까지도 제대로 모르겠다. ‘보고 전화가 외부로 누설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그렇다는 한 선배의 답변은 지금까지도 희대의 헛소리라고 생각한다. 이외에도 빠른 구질서 적응을 위해 신입 기자들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는 장치들은 많다.
나는 이런 불합리한 교육이 지금까지 생존한 이유로 두 가지를 꼽는다.
첫째는, 교육을 거치며 신입 기자들의 날카로움도 무뎌지기 때문이다. 내가 겪은 것과 같은 교육을 거치며 수도 없이 선배를 욕했을 나의 선배도, 똑같은 교육을 나에게 내리물림 한 것을 보면 명징하다. 온갖 불합리함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교육 기간이 끝나면, 신입 기자는 정식으로 조직의 일원으로 인정받는다. 오고 가는 농담과 술잔 속에 과거의 잔혹했던 기억들이 미화된다. 전우와의 술자리에서 군 생활 담화가 아름답게 흘러가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이런 현상의 이면에 놓인 심리학적 원리 및 구조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지나간 흑역사를 하나씩 음미하며 그런 경험들이 지금의 나, 이제는 이 바닥의 생리를 잘 아는 유능한 기자를 만들었다는 착각에 빠진다. 배움은 고난과 역경을 딛고 일어설 때 얻어지는 것이라는 명제를 맹신한다.
이렇게 영혼이 세탁된 기자들은 뒤이어 들어오는 후배들에게 같은 교육을 물려준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불합리함이 아주 조금씩은 줄어들기 마련인데, 이에 대해 “너희들은 편하게 하는 거야”라는 등 몰상식한 발언을 일삼는다. 후배들의 미숙함을 맹렬히 질타하며 훈계한다. 쉽게 말해 개구리 올챙이적 생각 못하는 꼴이다. 모든 기자가 이렇지는 않다. 여전히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동기도 다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도 구시대적 교육 방식에서 탈피하진 못했다. 후배들에게 불합리한 교육을 물려주는 데 죄책감은 가지고 있지만 개선하기 위한 노력은 없다. 이들이 개선하지 못하는 데는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대안이 없다, 이것이 불합리한 교육이 살아남은 두 번째 이유다. 기자가 되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이른바 ‘언론 고시’를 들여다보자. 대입 시험이 대학교에서의 수학능력을 검증하기 위한 시험이듯이 모든 시험은 평가하고자 하는 역량에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언론 고시는 그렇지 않다. 언론 고시를 구성하는 큰 축은 논술과 상식이다. 이들은 기자의 자질을 검증하기 위한 도구가 될 수 없다. 부장급 기자가 되어도 쓰기 힘들 사설(논술)은, 현장에서 취재하고 기사를 작성할 평기자를 위한 시험이 될 수 없다. 현직 기자들도 제대로 알 수 없는 광범위하고 난해한 상식 시험은 로또에 가깝다. 정해진 주제도 범위도 없는 시험(그래서 고시로 불린다고 나는 생각한다)에서 기자 지망생들은 시간을 허비한다.
기자 시험이 이토록 비체계적인 것은 ‘기자가 되기 위해 갖춰야 할 자질과 역량’이 무엇인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좋은 언론/기자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어느 누구도 명확한 답을 내리기 어렵다. 있더라도 ‘단독 기자’,‘특종 기자’ 등 구시대적 기자상에 머물러 있는 것이 현실이다. 저널리즘에 대한 사회 전반의 인식도 성숙하지 못하고 학문적 연구도 미비한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상황에서 규준화 된 교육은 없고 주먹구구 도제식 교육이 이뤄짐은 당연지사다. 아무것도 모르는 1년 차 기자가 신입 기자를 가르치게 된다. 흉내 낼 수 있는 것이라곤 미숙함에 대한 질타뿐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기자에게 가르침을 받은 아무것도 모르는 기자는 스스로 깨우침을 얻거나, 그렇지 못한 경우 기레기로 전락한다.
이렇게 구질서에 녹아든 기자는, 언론 특유의 폐쇄적 소통 구조에 갇힌 채 악순환의 고리를 깨지 못한다. 언론은 계속 그렇게 굴러가고 기레기를 양산한다.
좋은 언론을 갖지 못한 사회와 국민은 불행하다. 그리고 내 기준에서 한국 땅에서 좋은 언론은 몇 없다. 개인의 기자들이 좋은 언론을 위해 고군분투한다 한들, 그들의 노력은 비정상 비효율적 문화에 파쇄되어 허공에 흩뿌려지고 있다. 때문에 우리 사회와 국민은 불행하다. 다분히 결과론적인 해석일 수도 있겠지만, 최근의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이야기들은 어쩌면 좋은 언론의 부재에서 탄생할 결과일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서술한 언론 내부의 문제들(이외에도 아주 많은 문제가 산적해 있지만)이 해결되지 않는 한 좋은 언론이 설 땅은 넓어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불행도 쉽게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언론을 입법, 행정, 사법에 이은 제 4의 권력이라고 한다. 권력들을 감시하는 또 하나의 권력이다. 그러면 또 하나의 권력은 누가 감시하나? 언론에게는 명확한 감시자가 없다. 그래서 언론이 누려야 할 엄격한 자유는 방임으로 흘러 왔다. 언론이 가지는 막대한 사회적 영향력에 취해 스스로 대단한 권력을 가진 것처럼 내부에서 위계질서를 세우고 서열화하며, 신입원에게는 신고식에 가까운 교육을 대물림한다. 폭력으로 다스려지는 기자들에게 사회적 약자를 살필 여유는 희박하다. 대등한 권력을 상대로 힘겨루기에 매진할 뿐이다.
기성 체제의 혁신은 외부의 자극이 있을 때 시작한다. 관습에 갇힌 자들의 스펙트럼에 혁신이란 없다. 지금 언론에게 스스로 혁신하길 바라는 것은 어렵다. 소통할 수 없는 문화는 기자들의 자유로운 비판을 제한한다. 문제점을 비판할 수 없는 조직에 개선과 진보는 없다. 때문에 지금 언론의 가장 큰 문제점이라 할 수 있는 것 중의 하나인 신입 기자 교육은 쉽사리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날카로웠던 기자 지망생들이 기성 언론에 편입되며 무뎌지고 그들의 문화에 물들고 또다시 구태를 반복한다. 안에서는 출구를 찾을 수 없다.
다행인 건, 디지털 매체의 발달과 부상으로 기성 매체들의 존립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다. 신문 구독부수가 급감하고 지상파 뉴스 시청률이 떨어지면서 그들에게 다가온 경제적 위기감은, 그들이 향유해 온 전근대적 언론 모델 혁파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또한 디지털 신생매체들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그들이 제시하는 새로운 언론 모델이 주목받고 있다. 수직적 위계질서와 강압적 의사소통이 더 이상 훌륭한 콘텐츠를 만드는 문법이 아님이 증명되면서 기성 언론들도 변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언론계를 감돌고 있다.
외부의 자극이 출구를 마련했으니 이제 중요한 건 언론 구성원들의 노력이다. 그들에게 여전히 좋은 언론과 저널리즘을 향한 열망이 남아 있다면, 다가오는 존립의 위협을 단기적 연명으로 대처하는 대신 내부 정화의 기회로 포착해야 한다. 불합리한 그리고 불평등한 소통을 지양하고 조직의 권위에 취해 신입을 함부로 대하는 미개함을 버려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자격을 가진 자만 이 언론의 무게를 나눠질 수 있도록, 양화가 악화를 구축하는 장치가 마련돼야 할 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희망사항에 불과하다. 쉽사리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지원사격뿐이다. 내 글이 언론의 수뇌부에 적중하도록 필력과 날카로움을 다듬는 일뿐이다. 그리고 기성 체제에 과히 물들지 않은 젊은 기자들과 예비 언론인을 지지하는 일뿐이다. 종국에는 이 모든 것이 더 나은 언론을 만드는데 기여했기를 바라면서…
이 글은 '서울대 사회학과 원생들이 주축이 되어 창간한 공공 사회학 공론장' <월간 틀> 11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https://monthlykwak.net/2016/11/21/%EB%92%B7%EB%8B%B4%ED%99%94-fr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