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유럽도시기행1_유시민
코로나19 해제와 함께 국제공항이 몹시 붐비는 요즘이다. 사람들은 집에 멈추고 머물며 지낸 몇 년의 시간을 보상받듯 그토록 바랐던 곳으로 부지런히 떠나고 있다. 이때 해외여행은 종종 두 갈래로 나뉜다. 아름다운 경치를 보며 편히 쉬는 휴양, 그리고 미술관과 건축물 등을 보고 체험하는 관광. 관광 중에서도 많은 사람의 버킷 리스트로 꼽히는 여행지는 단연 유럽이다.
낯선 도시를 여행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나는 도시가 품고 있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새로운 것을 배운다.
나 자신과 인간과 우리의 삶에 대해 여러 감정을 맛본다.
그게 좋아서 여행을 한다.
- 유럽도시기행1 中
모든 게 그렇듯 여행도 알고 가면 달리 보인다. 특히 서구의 문명과 정치의 시발점인 곳, 신화와 문화의 대륙인 유럽은 역사 배경지식이나 미술 혹은 예술에 대한 사전 정보를 쌓고 간다면 눈이 뜨이고 귀가 열리는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다.
유시민 작가의 <유럽 도시 기행 1>은 여기에 딱 맞는 책으로 추천할 만하다. 자신을 지식 보부상이라 칭하는 그는 유럽의 건축물과 거리, 박물관, 예술품들이 자신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어서 이 책을 썼다고 한다. 거기에 담긴 역사와 문화 지식 정보를 작가 특유의 시선으로 풀어냈다.
인생은 너무 짧은 여행이라는 말에 끌려 유럽 도시 기행을 시작했다는 저자. 그는 스무 살 무렵부터 유럽의 도시들에 매혹되었다고 한다. 유럽인들은 어떻게 더 자유롭고 너그럽고 풍요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었을까에 대한 궁금증 때문이다.
책에는 유럽의 중심도시인 아테네, 로마, 이스탄불, 파리 네 도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정치, 사회, 문화적 성취의 도시이자 인류 문명을 크게 바꾼 역동적인 도시이기 때문이다. 친절하게도 작가는 평범한 한국인 단기여행자들과 같은 방식으로 다니며 그들에게 유익한 정보를 제공한다. 이 정보라는 것이 실전 여행 팁이 아닌 ‘도시와 사람’이라는데 포커스가 맞춰져 있기 때문에 인문학적으로도 굉장히 풍부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먼저 아테네. 우리가 ‘유럽’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들이 그곳에 모두 있다. 여행지 곳곳은 재미있는 이야기로 가득하다. 플라카 지구의 골목은 성차별과 노예제도가 당연하던 시절에 “만인은 똑같은 자유를 누릴 능력을 갖추고 있다.”라고 주장하며 일부 시민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던 소크라테스가 누비던 곳이다. 골목을 누비며 우리는 또 연상되는 철학적인 질문들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아고라와 프닉스 언덕은 어떤가. 지금은 그저 완만한 비탈일 뿐이지만 당시 서구 문명의 빅뱅이 일어났던 곳이기도 하다. 철학과 과학, 민주주의를 탄생시킨 고대 도시 아테네의 현재는 조금 초라하다. 낡고 바랬지만 내면의 기품을 가지고 있는 아테네, 금융위기로 인한 후유증이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아테네를 두고 ‘어제의 미소년이 세상의 풍파를 겪은 철학자’라고 한 저자의 표현이 재미있다.
다음은 로마다. 아테네가 서구 문명의 빅뱅을 일으켰다면 로마는 가속 팽창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관광지로 몹시 활성화된 도시라 로마가 익숙한 독자들도 많을 것이다. 개선문, 포로 로마노, 판테온, 트레비 분수,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 많이 보았고 또 책으로, 수업으로 들어온 서구 역사의 이야기들은 책을 보면서 또 새로이 알고 깨닫게 되었다.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넘어가는 시기의 집정관이었지만 제정 기틀을 세워 옥타비아누스가 황제가 될 수 있었다는 것, 브루투스가 공화정 때문에 카이사르를 살해했다는 것을 새삼 알 수 있었다. 서구 역사를 이야기할 때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종교인데, 피오리 광장에서 처참히 처형당한 조르다노 브루노의 이야기를 통해 교황청의 권력과 종교 내의 죄악, 사람들의 희생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다. 꼭 이 이야기들을 잘 기억해 두었다가 꼼꼼히 다시 보고 그 의미를 되새겨보고 싶다.
튀르키예의 이스탄불을 떠올리면 늘 화려하고 거대한 분위기가 떠오른다. 오랜 세월 경제 문화적으로 번영했던 도시지만, 지금은 그 다양성이 실종된 지 오래다. 책을 읽으며 비잔틴 제국의 기독교와 오스만 제국의 이슬람교가 뒤섞여 있는 이상하고 혼란스러운 아야소피아 박물관에 가보고 싶어졌다. 로마 교황청과 그리스정교회, 십자군 원정과 베네치아 상인들까지 연루된 이 건물이 종교와 정치, 강압과 반발의 모든 역사를 담아낸 것 같아 아주 재미있게 느껴졌다. 토프카프 궁전이 술탄의 거처와 관청으로 쓰기 위한 제국의 심장부였다면 돌마바흐체 궁전은 베르사유 궁전의 모조품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역시 유시민 작가는 역사와 문화, 정치 등과 관련하여 이야기를 풀 때 남다른 지력을 뽐내는 것 같다. 이스탄불이라는 인류의 진정한 코스모폴리탄을 이해함에 있어 큰 도움이 되었다.
마지막으로는 작가가 인류 문명의 최전선이라 표현한 파리다. 프랑스를 떠올리게 하는 것들은 너무나 많다. 에펠탑, 노트르담, 루브르 박물관, 개선문, 샹젤리제 거리, 빅토르 위고, 오르세 미술과, 베르사유 궁전, 프랑스 대혁명 등…. 그러나 나는 이것들의 숨겨진 이야기에 대해 아주 일부만 알고 있었다는 것을 책을 읽으며 깨달았다.
작가가 설명해 주는 곳곳의 건물들은 수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노트르담이 말하는 민주주의, 강압과 자유에 대해서, 루브르가 보여주는 인간의 탐욕과 권력, 집단적 허영심에 대해서, 베르사유 궁전이 풍기는 유한계급의 사치스러움에 대해서 떠올려 볼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노트르담 성당이 불에 탔을 때 불과 며칠 만에 복구 성금이 1조 원 넘게 모였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무조건 서구 문화를 동경할 필요는 없지만 옛것을 가벼이 여기거나 부정하지 않고 혼신을 다해 지키려는 그 마음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나 자신과 인간과 우리의 삶에 대해 여러 감정을 맛본다. 그게 좋아서 여행을 한다.”
작가의 말이다. 여행에 드는 시간과 유럽이라는 지역의 물리적 거리는 바쁜 일상을 사는 우리에게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러나 삶 자체가 짧은 여행이라는 말을 떠올려 봤을 때 시간과 공이 드는 이 유럽 여행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자유롭고 풍요로운 사회의 시작. 민주주의의 시작. 철학과 토론, 인간다움에 대한 고민의 시작을 가까운 곳에서 바라볼 수 있다면 또 다른 삶이 시작되지 않을까.
저자는 이 기행문을 위해 도시당 4박 5일을 기본으로 머물며 단기 여행자의 관점으로 다녔다고 한다. 마음만 먹는다면 이 책을 읽는 독자도 그의 시선을 따라 오래된 도시와 사람들의 이야기를 깊고 풍부하게 즐길 수 있을 것이다.역사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 그저 시가지만 걸어도 나라마다 건물이 조금씩 다르고 그 낡은 건물에서 풍겨 나오는 분위기가 신비한 그곳을 책에서 읽은 지식으로 다시 만끽해 보고 싶어진다. 하나를 알고 나면 하나 이상을 알고 싶어지니 너무나 타당한 여행의 이유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