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
오랜만에 혜수를 만났다. 혜수는 몇 안 되는 내 친구인데, 우리가 처음 만난 게 열여덟이었으니까 그녀와의 인연도 거의 이십 년이 되어간다. 진짜 내 모습을 보여도 이해해 줄 수 있을 것 같은 사람, 혜수는 나에게 그런 친구이다.
혜수를 만나는 것은 꽤 오래간만이었지만 우리는 언제나 그렇듯 어제 본 것 마냥 거리낌 없이 대화를 이어나갔다. 사실 나는 그녀에게 나름 중대한 나의 결심을 털어놓을 작정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긴장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나름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말을 꺼냈다.
"혜수, 나 이번달까지만 일하고 퇴사한다."
나의 퇴사에 대한 이야기를 주변 지인들에게 알렸을 때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다. 한 부류는 퇴사의 연유와 향후 내 미래의 계획을 궁금해하는 사람들. 그리고 또 다른 부류는 내 결심에 공감해 주면서 축하와 감탄, 부러움의 감정을 전하는 사람들이었다. 열이면 열 모두가 두가지 중 하나의 반응을 보였기 때문에 그녀에게 그 말을 꺼내는 나도 새로운 리액션을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그저 혜수만은, 나라는 사람을 잘 이해하고 있어서 '잘했어.' 한마디 해주면 좋겠다고만 생각했다. 아무튼 나는 이번에도 뻔한 반응을 예측하며 심드렁하게 말을 꺼냈다.
혜수는 눈을 반짝이며 나에게 대답했다.
"진짜? 니도? 야, 나도!"
요약하면 이렇다. 꽤 오랜 기간 단기 전문직으로 근무해 왔던 그녀 또한 그동안의 업무 스트레스와 체력적인 한계 때문에 당분간 일을 쉬기로 막 결심을 내린 상황이었는데, 마침 마지막 근무일까지도 나의 퇴사일과 완벽히 같았던 것이다. 나는 예상 밖을 한참 벗어난 그녀의 대답에 유쾌함을 느꼈고, 나와 같은 선택을 한 사람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친구임에 안도감이 들었다. 온 신경이 환해지는 것 같은 동질감 덕분에 퇴사로 인해 갖고 있던 불안함까지 완전히 녹아 사라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원래도 할 말이 많았지만 삼십 대 중반의 퇴사라는 강력한 공통분모까지 겹친 우리는 그날 한 시도 쉬지 않고 수다를 떨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더 늦기 전에 같이 해외여행을 가자.'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2024.09.
혜수에게 연락이 왔다.
"나트랑 가는 거 어때? 항공편도 저렴한데. 생각해 보고 말해줘. 바쁘면 다음에 가도 되고."
나트랑?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었는데.
그런데 또 딱히 싫을 이유가 없었다. 나는 지금 내 삶에서 가장 여유로운 시기를 보내고 있고, 이 시간을 더욱 완벽하게 보내기 위해서는 '해보지 않은 것'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친구와 해외여행을 간다는 것은 내가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상황이며, 심지어 나는 베트남에 가본 적도 없었다. 그리고 우리가 계획하던 여행 날짜는 베트남이 우기인 시기라서 항공편도 무척 저렴했다. 여행 내내 비가 올 수도 있지만 일단은 GO. 왠지 이 결정을 다음으로 미룬다면 이와는 비슷한 기회조차 앞으로 영영 오지 않을 것 같다는 이상한 편견에 사로잡힌 나는 약간의 고민을 마친 다음 그녀에게 연락했다.
"그래, 우리 나트랑 가자!"
그녀와 나의 3박 5일간 이어질 나트랑 여행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