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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 Sujin May 16. 2024

서아 #7 젓가락

 마음이 심란하다. 이럴 땐 단순노동이 최고다. 마음을 씻고 싶었던가. 설거지를 해본다. 그릇들을 차곡차곡 세척기에 넣고 마지막은 숟가락, 젓가락 차례이다.


 젓가락. 혼자서는 별 쓸모가 없다. 그렇다고 아무 하고나 만나서도 안된다. 자기를 꼭 닮은 다른 한쪽이 있어야 제 구실을 한다. 재질이 달라서도 안되고, 길이와 쉐잎이 달라서도 안된다. 새겨진 그림이라도 있을라치면 그 그림까지 완벽하게 같아야 비로소 한 쌍이 된다. 그렇다고 한 쌍을 찾는 것이 꼭 어려운 일은 아니다. 보통 집에 같은 젓가락이 다섯 벌 이상은 될터, 자신을 제외하고 최소 아홉 중에 하나와 짝을 이루면 된다.


 웃음이 난다. 나는 나와 전혀 다른 짝을 만나 한 쌍이  걸까? 꼭 같은 사람이었다면 이렇게 다툴 일이 있었을까 싶다. 꼭 닮은 사람과 짝이 되도록 운명 지워졌다면 짝을 찾는데 어려움도 없었을 텐데 말이다. 최소 아홉 명인 것도 괜찮다. 근데 다 똑같은 놈들이면 그놈이 그놈인 거네. ㅎㅎ. 설거지하는 와중에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면서 웃음이 난다.


 다행스럽게 사람은 짝을 만나지 않아도 혼자 제 구실 하면서 살 수 있다. 굳이 짝을 찾는다 해도 본인과 꼭 닮은 사람을 골라야 할 필요는 없다. 사실, 누구를 선택해도 된다. 성별, 국적, 나이, 신분, 종교 아무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그 망할 사랑이었다. 사랑은 '콩깍지'라 불리는 초강력 렌즈를 내 눈에 씌워 도통 진실을 보지 못하게 했다.  최소 같은 재질, 같은 길이에, 같은 쉐잎이었어야 했다. 그래야 살아가기가 수월하다.


 그래. 같은 부류를 만났더라면 더 수월할 뿐이다. 반대로 나와 전혀 다른 이 인간과 사는 것은 조금 덜 수월할 뿐이다. 시작은 더 설레었고,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오는 기쁨 또 한 많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이 사람과의 대화는 아직 유쾌하고, 즐겁다. 내가 판단할 수 없는 일에 결정을 내려 줄 거란 믿음도 있다.


 하마터면 젓가락한테 밀릴 뻔했다. 서로 다른 사람을 만나 살아가는 일은 매일이 수행이다. 나와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그 사람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그가 나를 이해하도록 설득시키는 노력들의 반복이다. 그 노력들이 점차 한 사람을 넘어 타인으로 확산될 때 내 스스로도 변화하고 성장할 것으로 믿는다. 아, 그래서 사랑은 내게 콩깍지를 씌워 이 인간을 선택하도록 했구나. 심난했던 마음이 조금은 정리가 된다. 그러나 여전히 수행의 길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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