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시절
동생들 셋이랑 함께 겨우 얻은 전셋집에서 살며 아침에 도시락 4개를 싸며 대학교 다니던 내가 어느 날 엄마에게 묻는다.
"엄마, 사는 게 왜 이렇게 힘들어?"
자취방을 돌아다니다가 발에 동상마저 걸려버린 남동생을 보며 서글퍼진 나는 아빠에게 힘겹게 말을 꺼냈다.
" 아빠, 자취방에 매달 내는 그런 힘든 것 말고 한꺼번에 돈 내고 우리 전셋집 얻어주시면 안 돼요?"
시골에서 농사짓고 사시면서 조금 더 수입이 좋은 포크레인 일을 하시던 아버지는 집에 있는 송아지를 팔아 나랑 동생 셋이 머물 수 있는 전셋집을 겨우 마련해 주셨다.
처음으로 살게 된 방 두 칸에 부엌, 그리고 주인집과 떨어져 있는 우리만의 수도가 있는 전셋집이었다. 화장실이 밖에 따로 있고 샘에서 샤워를 해야 했지만 우리끼리만 사용하는 샘이어서 샤워는 천막을 치고 하면 되었다. 겨울에는 연탄불에 물을 데워서 샤워를 했다. 얼마나 감격스럽고 행복했던 우리의 보금자리였던지 지금도 생각하면 동생들에게 밥 해주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그리고 대학교 생활을 하던 나에겐 꿈같은 일이었다.
김치를 담는다고 시장에 나가 배추를 사 갖고 비닐봉지에 담아서 질질 끌고 오면서 아마도 내가 엄마에게 그렇게 물었던 것 같다.
나도 20대 초반인데 가정주부들이 하던 일을 해 가면서 학업도 해야 했고 아르바이트도 해야 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그 당시에는 시골에서 살던 아이들은 학업을 위해 도시로 나올 수밖에 없었고 그러면 으레 이 그 집안 장녀가 모든 것을 책임지고 살아야 했다.
나는 지금도 생각한다, 농부들에게 자녀들을 키우고 고등교육을 시켜주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불공평한 일인지 말이다.
매월 들어오는 월급도 없고 한 해 추수가 끝나야 게우 들어오는 수입으로 1년을 살면서 도시로 나간 자녀들 방세와 생활비까지 대주어야만 했으니 말이다. 그러면서 늘어가는 부채는 누구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은 집에서 다니면서 버스비만 내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