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을 바꾸는 한 걸음

또 다른 도약

by Suki

1995년 직장을 다니며 3년 동안 모은 단 돈 오백만 원을 들고 난 독일 유학길에 오른다. 가난한 집안의 장녀였던 나는 다시 돌아와도 그 자리에 있을 내 생활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유학을 지원해 줄 경제적 여유가 있는 집안이 아니었기에 학비가 들지 않는 독일이 나에게는 최고의 그리고 최선의 나라였다. 먼저, 독일의 각 대학교에 입학 신청서를 편지로 보내고 입학허가서를 애타게 기다린다. 드디어 도착한 입학허가서를 들고 부모님께 내 결정을 알려드렸다.

" 엄마, 아빠, 딱 2년만 나갔다 올게요."

어차피 내가 돈을 벌어서 해야 하는 유학 생활이었기에 학업을 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다른 세계를 경험하고 일상에서의 탈출을 꿈꾸던 나에게는 그 2년도 충분했다. 독일대사관에 가서 아버지 앞으로 있는 농지와 선산을 보증으로 하고 김포공항에서 이민가방을 들고 태어나 처음으로 비행기를 탔다. 다행히 나에게는 대학교 다닐 때 같은 과를 다녔던 친구가 먼저 독일에 가 있었고 그 친구가 고맙게도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마중을 나와주었다. 처음 한 달은 그 친구의 집에서 신세를 졌고 그 후로는 방을 따로 얻어 살았다.

독일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거주지 등록을 할 때 내가 받았던 건강검진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독일에서는 외국인 관청에서 외국인 등록을 하려면 의료보험이 필수이다. 그 당시 학생이 아니었던 나는 사보험밖을 들 수밖에 없었다.

일단은 건강검진을 받아야 하는데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은 선진국인 일본만 제외하고 모두 대변검사를 해야 했다. 88년 올림픽이 끝나고 나름 한국이 잘 사는 나라라고 자긍심을 갖고 있던 나에겐 매우 기분 나쁜 일이었다. 한국이 이렇게 후진국 취급을 받다니! 결국 의사랑 손 한 번 잡고 대변 검사하는데 200마르크가 순식간에 나갔다. 그렇게 자긍심에 상처를 입은 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에서는 북한인지 남한인지를 항상 물어보는 사람들을 상대하며 대한민국이 선진국에 준한다는 자긍심을 가지고 독일생활을 시작했다.

나의 독일 적응 처음 단계는 무엇보다 언어를 최대한 빨리 정복하는 것이었다. 일단은 대학교에서 운영되는 저렴한 어학코스를 다니면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용돈을 벌었다. 그 이후에는 대학교 입학시험용 언어자격증을 따기 위해 또 다른 인증테스트를 받았다. 그렇게 인증테스트에 합격해서 6개월간 무료로 해당 대학교 어학 시험준비반에 들어갔다. 어학시험은 문법과 독해, 듣기 평가 그리고 작문으로 이루어진다. 정신없이 바빴고 두려웠지만 하루하루가 흥미진진함의 연속이었다.

가지고 온 돈이 독일의 비싼 물가에 점점 줄어들어갔다..

나에게 절실한 학생증은 독일에 도착한 후 10개월이 지나서야 받을 수 있었다. 독일은 매 학기 등록금만 내면 그 주에 있는 거의 모든 교통수단이 학생증 하나로 무료였다. 그 당시 독일 헤센주의 1학기 등록금은 약 150마르크 정도로 대충 15만 원 에서 20만 원이었으니 한국보다도 훨씬 저렴하였다.

정식으로 대학생이 되고 학생증 하나로 그 주의 모든 교통수단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학생 기숙사에서 저렴하게 생활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는 것, 이 두 가지가 한국보다 높은 독일 물가에 허덕이던 나에게는 아주 커다란 성과이자 도약이었다.

하지만 그때 나는 몰랐다. 부모님께 약속한 2년간의 해외생활이, 그리하여 한국을 떠나 독일로 와서 운명을 바꾸고 싶어 하던 나의 한 걸음이, 남은 인생의 평생이 될지를..

그리고 당시 간경화를 앓고 계시던 아버지를 김포공항에서 뵌 것이 마지막이 될 줄은...

작가의 이전글농가 자녀들의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