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은 강물이 되어
1년 반 만에 다시 돌아온 한국, 그해 12월엔 눈이 하염없이 내리고 있었다. 두려움과 호기심으로 가득 찬 마음의 풍선을 달고 한국을 떠났던 나에게, 다시 돌아온 고국은 어둡고 서늘하기만 했다.
슬픈 일은 갑자기 찾아왔다.
학생기숙사에서 한국친구들과 남자친구와 모여 한국 음식을 해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당시엔 국제 전화요금이 비싸 한국에서 전화가 오는 일이 극히 드물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를 찾는 연락이 왔다. 고향집 옆 집에 사시는 아주머니였다. 수화기 너머 들려온 목소리에 세상은 순식간에 검게 변했고 , 나는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네 아버지가 너를 찾고 계신다. 쓰러지셔서 병원으로 옮겼는데 오래 못 사실 것 같어. 얼른 한국으로 와야겄다."
전신이 떨려왔고 눈앞이 하얘지며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 당장 한국으로 가야 한다는 절박함이 충격을 앞질렀다.
지인의 도움으로 그 당시 일주일에 단 몇 차례뿐인 한국행 대한항공 티켓을 정신없이 구했다.
아버지를 다시 뵙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며, 쏟아지는 눈물을 닦을 새도 없이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나를 도저히 혼자 보낼 수 없다며 따라나선 남자친구의 손을 꼭 잡은 채, 난 끝없이 길게만 느껴지는 비행시간을 간신히 버텼다.
그렇게 도착한 김포공항은 스산하기 그지없었다. 낯선 땅 한국에 얼떨결에 첫발을 내디딘 남자친구와 함께 서둘러 충청도 두메산골로 향하는 기차에 올랐다. 한국의 매서운 추위가 처음인 그였지만, 나를 곁에서 지키는 그의 눈은 정작 자신의 추위보다 내가 금방이라도 쓰러질까 봐 걱정하는 안쓰러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어깨에 기대어 창밖을 보니, 나의 슬픔을 하얗게 덮기라도 할 듯, 눈은 쉬지 않고 내리고 있었다.
역까지 마중 나온 대학시절 친한 친구와 함께 눈 속을 헤치고 고향 집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는 이미 운명을 달리하신 뒤였다.
간경화 투병 중이셨지만 관리만 잘하면 오래 사실 수 있었다. 하지만 기나긴 투병 끝에 주치의를 바꾼 것이 화근이었다. 전문의라는 그 의사는 아버지에게 간경화 증상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고, 아버지는 그 말을 믿고 몇 주간 술을 드셨다고 한다.
일터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지신 아버지를 모시고 여러 병원을 전전했지만, 이미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병원들은 아버지를 받아 주지 않았다. 지인의 도움으로 간신히 입원했을 때에는 이미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였다.
울며 달려온 나를 맞이한 것은 마을 초입부터 보이던 상가의 표식, 그리고 마당 한복판에서 하얀 김을 내뿜으며 끓고 있던 육개장이 가득 담긴 가마솥이었다.
나를 본 동네 아주머니들은 문상객을 챙기던 분주한 손길을 잠시 멈추셨고, 하얀 소복을 입은 어머니는 나를 보자마자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셨다. 어머니 뒤편, 일찍이 남편을 여의고 큰아들 하나만을 의지하며 반평생을 사신 할머니는 넋이 나간 채 마루에 앉아 계셨다. 감정이 모두 메말라버린 할머니의 얼굴은 초점 없이 허공만을 응시할 뿐이었다. 그 곁에는 삼베옷을 입은 남동생이 상주가 되어 안방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퉁퉁 부어오른 눈을 하고서도 묵묵히 문상객을 맞이하는 동생의 모습이 사무치게 서글펐다.
일부러 군불을 넣지 않아 한기가 도는 안방 병풍 뒤, 내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따뜻한 온기를 머금고 계셨던 아버지가 이제는 얼음조각처럼 차갑게 누워 계셨다.
나는 병풍 뒤로 들어가 차갑게 식어버린 아버지의 머리맡에 앉았다. 아버지의 이마에 손을 올리는 순간, 손끝을 타고 온몸으로 파고드는 그 서늘한 냉기에 서러움이 북받쳐 한참을 울고 또 울었다
그것이 나의 눈물겨운 귀국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