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년에 걸쳐 느꼈던 것들을 하나의 글에 압축하려 하니 버겁다. 글로 다 표현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디로든 발걸음을 옮겨야 하는 여행자의 마음으로 한 문장씩 써 보겠다. 문화란 대체 뭘까? 무엇이길래 그렇게 많은 사람을 홀린 걸까. 뇌에 어떤 이상한 작용을 일으키는 건 분명하다. 특히 나같이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한테는 더욱.
체코에서 2년 동안 살고, 유럽의 여러 도시를 여행하면서 나는 잘 보존된 유럽 문화에 미친 듯이 부러움을 느꼈다. 왜 한국은 이만큼 보존하지 못했을까 하며 아쉬워했다. 일단 내가 목격한 유럽 문화에 대해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유럽에는 수많은 국가가 있는데, 적어도 '유럽'이라고 뭉뚱그려서 얘기하려면 신빙성 있는 데이터가 있어야 한다. 프랑스(파리), 스페인(바르셀로나), 이탈리아(로마, 피렌체, 베네치아), 그리스(아테네), 독일(베를린, 프랑크푸르트, 뮌헨, 퓌센, 볼프스부르크), 오스트리아(빈), 체코(프라하, 브르노, 오스트라바, 체스키 크룸로프, 올로모우츠, 크로므녜르지시, 미쿨로프, 레드니체-발티체), 슬로바키아(브라티슬라바), 폴란드(크라쿠프), 헝가리(부다페스트). 북유럽 국가가 없는 게 데이터상 아쉽지만 일단 이렇게가 2020년부터 2023년까지 내가 방문했던 유럽 국가와 도시의 목록이다. 비행기표나 기차표도 제시할 수 있으면 신빙성이 더 생기겠지만 그렇게 되면 논문이니까 여기까지만 하겠다.
유럽은 관광산업이 발달했다. 사람들은 왜 유럽으로 여행을 갈까? 여러 목적이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의외로 '건축'은 큰 부분을 차지한다. 콜로세움, 에펠탑, 사그라다 파밀리아 등 '랜드마크'인 건축물은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요인이다. 즉 유럽 문화의 엄청난 아우라를 형성하는 요소가 건축이다. 사람의 힘으로 지은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거대한 규모의 건축물을 보고 나면 내 머릿속에 있던 건축물에 대한 개념이 깨지면서 충격을 받는다. (여담이지만, 어쩌면 그렇게 생성된 도파민을 또 느끼고 싶어서 사람들이 새로운 곳으로 또 여행을 가려는 지도 모른다) 보통 그렇게 압도적이고 거대한 건축물은 성, 궁전, 성당 등이다. 왕이나 신 등 지배자의 권위를 보여주기 위해 건축된 경우다. 크기와 시선은 곧 권력이기 때문에 계급사회가 존재한 세계 곳곳에서 거대 건축물이 지어졌다.
꼭 랜드마크로 유명한 대도시 말고도 흔한 소도시를 걷다 보면 그들만의 오래된 양식으로 지어진 건축물 사이를 어렵지 않게 지나다닐 수 있다. 마치 시간여행을 하는 듯하다. 중세의 건축이 그대로 보존된 경우가 많다. 완전히 부수지 않고 조금씩 보수하는 방향으로 도시를 발전시킨다.
유럽의 도시는 기본적인 구조가 광장 - 광장을 둘러싼 오래된 건물들 – 성당(광장에 성당이 있는 경우도 많다) - 중심가에서 멀어질수록 일반 주택가 - 인 형태다. 한국의 도시는 아파트, 신축건물, 구청 등등 '빌딩'이 대다수다. 대도시에는 유리로 덮인 매끈한 빌딩이 있고, 주택가로 가면 아파트, 벽돌로 만들어진 빌라, 주택은 슬레이트 지붕에 콘크리트로 만들어졌다. 공장에서 찍어낸 듯한 건축물이 즐비하다. 물론 그 가운데 아날로그적으로 미적인 부분을 신경 쓴 건축물도 있지만, 나는 지금 일반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건축물에 대해 말하고 있다. ‘공장에서 찍어낸 듯한’이란 구절은 사람들 사이에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데, 일단 중립적인 의미로 썼음을 밝힌다. 비슷하게 생긴 건축물이 많다는 의미고,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기 마련이다. 비슷하게 생긴 건축물이 많은 이유도 나중에 차차 밝혀 보겠다.
이러한 비교를 통해 나는 한국의 건축물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 궁금해졌다. 왜 한국의 소도시에서는 소도시만의 고유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질까? 이 땅에 옛사람이 살았던 것은 분명한데(내가 한국의 수많은 박물관에서 본 게 다 거짓부렁이 아닌 이상) 적어도 1900년대 전에 지어진 도시만의 고유한 건축물은 어디로 간 걸까. 건축은 도시의 이미지를 구성하는 큰 요소다. (일단 서울은 논외로 치자)
유럽은 오랫동안 봉건주의 체제로 돌아갔기 때문에 도시마다 옛 권력자가 살았던 성이나 궁전이 있다. 현재 그 성이나 궁전을 박물관, 미술관, 공원, 공연장, 문화시설 등으로 재사용하고 있다. (그야 이제 그 넓은 곳에서 떵떵거리며 살 귀족이 없으니)(영국 등 아직 있는 곳도 있지만) 그런 데 반해 한국은 재사용할 옛 건물이 없으니 미술관, 공연장, 문화시설 등을 새로 지어야 한다. 통유리로 덮인 문화센터 건물... 어디선가 한 번쯤 본 적 있지 않은가?
왜 유럽은 소도시에서도 그들의 건축을 중심지에서 발견할 수 있는 데 반해 한국은 한옥 건축물을 중심지에서 보기 힘들까? 왜 한국은 다른 방향으로 발전했을까? 이건 발전이 맞을까? 왜 유럽과 다를까? 유럽의 잘 보존된 건축유산을 보면서 부러웠다. 정작 어떤 유럽인은 오래된 건물이 너무 많아서 ‘지루하다’는 의견을 표했지만, 그 지루한 건물들은 유럽의 관광 자원으로서 톡톡한 역할을 하고 있다.
게다가 그들은 그렇게 잘 보존된 건축유산을 무대 삼아 그들의 전통문화인 클래식 악기를 연주하고, 그들의 복식인 양복을 입고 공연을 관람한다. 주말에는 미술관에 가서 그들의 조상이 그린 서양화를 관람한다. 미술관이라는 개념 자체도 그들의 문화다... 그들은 그들의 문화를 자연스럽고 자랑스럽게 계승하고 있었다.
한국에는 유수의 피아니스트, 성악가, 서양화 화가, 발레리나(노) 등 서양 문화예술 시장에서 이름을 날린 예술가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방송을 타고 인터뷰를 하고 대단한 위인으로 불렸다. 하지만 왜 반대의 현상은 일어나지 않는가? 한국의 판소리 시장이 거대해진 가운데, 폴란드인 소리꾼이 스타가 되어서 폴란드에 소리꾼 꿈나무들이 생길 수 없나? 여기서 피식하고 웃은 사람? 프랑스의 한 결혼식, 한국인 말고 프랑스인이 ‘격식을 차리기 위해’ 한복을 입고 나타날 수는 없나? (한국의 결혼식에 격식을 차리기 위해 양복을 입고 가는 것처럼) 하긴 그런 정도의 현상이 일어나면 ‘문화 전복’이 일어났다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꿈꿔보지 않을 이유는 없다.
왜 그들의 리그에 끼려고 부단히 노력하는가. 또 한 번 이 문장에 대해 차분히 해석하자면, 그들의 리그에 끼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사람들의 노력이 헛수고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글의 전체적인 방향성은 결국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태어난 이들이 서로 경쟁할 것이 아니라 정체성을 이용해 함께 부를 쌓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제안이다. 리그 자체를 한국 태생으로 만들어야 한다. 시장 자체가 한국이 본류가 되어야 한다. 세계인이 한국의 리그에 들어오기 위해 애쓰고 돈을 내고 교육을 받으려고 해야 한국에 자본이 쌓인다. (이때까지 한국인이 유학하겠다고 유럽과 미국에 낸 돈이 얼마나 될까?) 그래서 한국 문화 – 더 깊이 들어가서는 전통문화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나는 민족주의자가 아니다. (언뜻 읽어보면 민족주의자로 오해할 법하다) 민족주의의 끝이 어떤지는 역사가 증명하기에 그런 것을 반복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세일즈와 마케팅의 관점에서, ‘오리지널’이 가진 힘은 굉장히 크다.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지는 한국이라는 특질을 가졌다면 그것의 장점을 십분 이용해야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가질 수 있지 않겠는가?
여하튼 마지막으로 유럽이 잘 보존한 문화에 부러움을 느꼈다는 네 번째 계기와 앞에서 이야기한 세 개의 계기를 포함한 4가지의 이유로 인해 나는 한국 문화에 관심을 갖고 스스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후투티 작가 소개에 보면 한국 문화 발전에 기여하고 싶다고 써 놨는데, 그 문장을 쓴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꽤 긴 과정을 거쳐서 설명했다. 애초에 이 매거진은 이런 과정의 이야기를 담는 곳이니 취지에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