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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병길 Oct 15. 2023

헌양 고인돌을 찾아서

헌양 고인돌을 찾아서     

이병길     


오영수 문학관 입구 도로변에 커다란 돌이 있다. 언양고인돌, 언양지석묘(彦陽支石墓)이다. 1997년 10월 9일 울산광역시의 기념물 제2호로 지정되었다. 영남지역에서 가장 큰 고인돌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 고인돌은 한반도 전 지역에서 발견되며, 약 4만여 기가 분포한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전 세계 고인돌의 50%가 넘는다.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 부족장, 지배층, 권력자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 고인돌의 입지는 주로 강가나 하천변의 평지, 구릉 정상부와 그 사면, 고갯마루, 산기슭 등이며, 모두 덮개돌을 구할 수 있는 곳과 멀지 않은 곳이다. 평지 입지는 주로 낮고 평평한 구릉이 있는 평지보다는 산지 지형의 강이나 하천변 퇴적 평지에 자리하며, 고인돌은 강이나 하천의 방향과 나란히 열을 이루며 무리 지어 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크게 북방식과 남방식으로 나누어진다. 북방식 고인골은 4개의 받침돌을 세워 지상에 돌방(石室)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놓은 것으로 탁자식(卓子式)이라고도 하다. 남방식 고인돌은 받침돌의 있고 없음에 따라 두 개로 분류된다, 하나는 땅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것으로 기반식(碁盤式) 또는 바둑판식이라고 한다. 다른 하나는 바둑판식에서 받침돌이 없는 것을 때로 개석식(蓋石式) 또는 무지석식(無支石式)이라고 한다. 언양고인돌은 남방식 바둑판식(기반식)이다.     


언양고인돌 안내판에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언양 지석묘는 규모로 보아 영남지역 일대에서 가장 큰 바둑판식 고인돌이다. 지석묘의 상석은 길이 8.5m, 너비 5.3m의 덮개돌이 사다리꼴 모양으로 비스듬히 놓여 있다. 지석은 6매로 정도이고, 크기는 된 받침돌의 크기는 2.8m〜3.1m 정도로 거대한 편이다. 서부리 주민들은 이 지석묘를 ‘용바우’라고 부르며, 민속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치성을 드렸다고 한다. 아직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지하의 돌방 형태나 출토 유물은 알 수 없지만 보존 상태가 양호하며 덮개돌이 매우 큰 것이 특징이다. 이 지석묘는  청동기시대 언양 지역의 정치·사회·문화 등을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언양고인돌의 무게는 알 수 없으나 크기는 영남 제일이다. 전라북도 고창은 고인돌의 동네이다. 덮개돌이 300톤에 달하는 고인돌도 있다. 이 돌을 옮기는데 도대체 얼마나 많은 노동력이 동원되었을까? 이집트 피라미드를 세운 것과 같은 권력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고인돌에는 청동검, 거울, 방울 등 권력을 상징하는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헌양 지역의 고인돌은 향산리 지석묘[기념물 제22호], 지내리 지석묘[기념물 제23호], 교동리 지석묘, 송대리 지석묘가 있다. 향산리 지석묘는 상북중학교에서 북쪽 도로변에 있다. 도로 건너편에는 북방위 수장을 역임한 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자진 의거(義擧) 병사를 모아 경기도 의천 전투에 참전해 무공을 세우고 순절한 정대업 장군 무덤이 있다.     


지내리 고인돌은 바둑판식으로 상북 지내리의 신리마을로 연결되는 작은 길가에 위치한다. 현재 남아 있는 덮개돌은 길이 290cm, 너비 280cm, 두께 170cm 정도로, 받침돌로 보이는 것은 4매가 관찰되며, 상석단면은 삼각형이다. 덮개 돌에는 작은 홈과 같이 파인 성혈(性穴)이 있다.      


지내리 고인돌은 개인 사유지 안에 있다. 바로 인근에는 못안못이 있다. 못 주변을 한 바퀴 도는 데 15분 정도 걸린다. 못 안에 정자에 올라보면 멀리 영남산무리가 눈 안에 가득 들어온다. 못안못에는 불고기팜 농어촌테마공원이 있어 먹는 즐거움도 있다.      


언양 남천교를 가로지르는 언삼교를 지나 삼남읍 교동리에 언양향교가 있다. 향교 홍살문을 지나면 정문 바로 앞에 커다란 돌이 버티고 있다. 길의 왼쪽을 자리하여 공사할 때 옮기거나 깨뜨릴 수도 있었는 데 있다. 이 돌이 고인돌이다. 청동기시대의 무덤이 향교 입구에 버티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공자를 믿는 분들이 옛 무덤임을 알았을까? 그리고 고인돌을 비석의 받침돌로 사용한 이유는 무엇일까?     


교동리 고인돌은 화강암으로 모서리에 각이 없는 장방형이다. 크기는 길이 210cm, 너비 130cm, 두께 80cm다. 2003년 지표조사 당시 덮개돌 윗면에 비석을 꽂아 비대석으로 사용되고 있었는데 2015년 언양향교 정비공사 때 비석과 고인돌의 덮개돌을 분리해. 비석은 향교 도로변에 있다. 고인돌 아래 받침돌은 보도블록으로 인도를 조성하면서 확인되지 않는다. 덮개돌 윗면에 약 20개의 바위구멍(성혈)이 있다.    

  

헌양지역에 고인돌이 있음은 이 지역에 강력한 권력을 지닌 집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인돌은 죽은 자를 위한 제사나 추모의 공간이다. 그런데 고인돌에 성혈이 있음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성혈은 여성 성기의 상징으로 풍요와 다산(多産)의 의미로 해석되기도 하고, 태양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부인들이 작은 돌로 성혈을 열심히 문질러서 그 돌이 바위에 붙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이야기가 널리 전해 오고 있다. 삼남읍 방기리에는 이런 성혈이 모여있는 알바위가 있다. 고인돌이 무덤의 역할과 함께 시대가 변하면서 부족장의 힘이 현재화되기를 빌면서 성혈을 만들어 치성을 드리는 공간으로 기능을 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2023.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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