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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병길 Sep 08. 2023

2. 언양읍성을 한바퀴 돌아볼까-언양읍성의 역사(3)

- 언양읍성의 수난사

2. 언양읍성을 한바퀴 돌아볼까-언양읍성의 역사(3)   

- 이병길(지역사 연구가)

  

〇 언양읍성의 수난사     


석성으로 변모한 언양읍성에는 동서남북의 4개의 성문과 각 성의 모퉁이에 4개의 각루(角樓)가 있었다. 성문 앞에는 문을 보호하기 위한 반월 형태의 옹성(甕城)이 있었다. 누각(樓閣)은 사방을 감시하는 역할을 했다. 성문과 각루(누각樓閣)) 사이에는 방어를 위한 8개의 치성(雉城)을 만들었다. 치성은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병을 쏘기 위해 바깥쪽으로 돌출시켜 만든 시설이다. 성벽 바깥에는 적의 접근을 어렵게 하기 위해 3~5mdml 물고랑을 파고 그 안에는 뾰쪽한 말뚝을 촘촘히 박았다. 물은 남천의 부릿보에서 흘러들어오게 하였다. 고립된 성안에 반드시 있어야 할 우물도 2, 3개를 만들었다.      


읍성 안에는 언양현을 다스리는 관공서 건물이 들어섰다. 현감이 통치를 하는 공간이 동헌이 있었다. 그리고 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봉안한 지방관의 의례 공간이며, 동시에 지역을 방문하는 사신의 숙박 시설인 객사(客舍)가 있었다. 읍성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중앙자리에 있었다. 지방 양반이 수령을 보좌하는 유향소(留鄕所)인 향청(鄕廳), 아전들이 업무를 보는 작청(作廳) 등 30여개의 건물이 있었다. 물론 원형의 감옥도 있었다. 

▲ 1910년대 언양읍성 건물 예상 배치도. 고딕 사각형부분은 1908년 의병전투로 불탄 건물이다.

언양읍성이 세워지고 크고 작은 일이 있었다. 중종 12년(1517) 7월 경상도의 언양・경주・봉화 등지에  큰 비바람이 불어서 큰 나무가 뽑혀 쓰러지고 지붕의 기와가 모두 날아갔으며, 시내가 범람하고 곡식이 모두 상하고 산이 무너지고 집이 쓰러져 사람과 가축이 많이 압사하였으며 까마귀까지도 죽은 것이 있었다. 중종 17년(1522) 5월에  경상도의 안동(安東)·장기(長鬐)·언양(彦陽)·울산(蔚山)에 우박이 내렸는데 주먹만씩 하기도 하고 계란(雞卵)만씩 하기도 하여 벼와 보리를 크게 해쳤고, 사람들이 밭에 있다가 우박을 맞아 죽은 자도 있었다. 중종 19년(1524)에 경상도 김해(金海)·울산(蔚山)·경주(慶州)·양산(梁山)·언양(彦陽)에 크게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려서 나무를 뽑고 기와를 날려 새가 다쳐 죽고 보리와 밀이 거의 다 손상되었다. 명종 12년(1557) 5월에 경상도 동래・언양・경주 등지에 지진이 일어났다. 이런 기록을 통해 볼 때, 언양읍성은 비바람과 우박・지진 등으로 석성과 문루가 훼손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종 18년(1523) 언양현감(彦陽縣監) 홍언방(洪彦邦)은 인물이 하는 일이 욕심이 많고 더러웠기[貪汚] 때문에 백성이 모두 떠나고[流離] 도망하게 되었다. 관아(官衙)의 실화(失火)로 현감의 첩(妾) 모자(母子)가 모두 타 죽었다. 그 실화한 연유를 알 수 없었다. 현감은 파직되지 않았다.) 불탄 관아는 명종 4년(1549년)에 신축한 듯하다. “언양(彦陽)의 관사(官舍)를 건축할 때 승군(僧軍)을 동원하려고 하는데, 금년 같은 흉년에 굶주려 죽는 폐단이 생길 염려가 있으니, 동원하지 말라.”는 임금의 명령이 있었다. 하지만 중들은 역사(役事)를 피하여 놀고 먹으니 이러한 영선(營繕)에 동원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중이 된 고통을 알게 하여 중이 된 자들에게 징계가 될 것이라는 대사헌의 주장이 있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 언양읍성 서쪽 부분 치성 위에 집을 지었던 흔적을 볼 수 있다.(2023년)

임진왜란에 언양읍성도 피해를 피할 수 없었다. 양산과 울산을 함락시킨 왜적은 언양을 통해 경주로 침략했다. 언양현은 왜적에 의해 분탕과 점거를 겪었다. 평지성이었던 언양읍성의 건물은 불탔거나 성곽은 부분적으로 붕괴되었다. 허물어진 읍성은 광해군 9년(1617)에 개수(改修)하였다. 당시 현감은 이시망(李時望)이었다.

      

언양 고을을 옮기는 것을 허락한 후, 영조 18년(1742) 새 감사가 순행(巡行)하는 길에 언양에 이르러 고을 터와 성첩(城堞)이 온전하고 튼튼함을 보았고, 고을 백성들도 또한 옮기기를 원하는 뜻이 없었음을 확인하였다. 지역의 향임배(鄕任輩)들이 관리(官吏)들과 함께 모의하여 이건(移建)을 빙자해 침탈[侵漁]하고 뇌물을 받아먹고자 하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었다. 관리는 처벌받고 고을 이전은 백지화되었다.         


언양읍성의 동문을 망월루(望月樓), 서문을 애일루(愛日樓)라 하고, 남문을 영화루(暎花樓) 또는 진남루(鎭南樓), 북문을 계건문(啓乾門)이라 하였다. 현존하는 언양현 지도에는 읍성의 4대문이 그려진 곳이 많다. 1899년에 제작된 <청구도>, <언양군읍지>에 남문이 있었다.      


1900년 박영효가 보낸 활빈당이 통도사를 거쳐 언양에 왔다. 활빈당은 양산 상북몀 상삼마을의 부자 김재복을 납치하여 언양 석남사까지 끌고 가서 2만냥을 후원받았다. 언양읍성을 습격하리라는 소문은 있었지만, 언양에는 피해가 없고 운문령 근처 마을 45호를 불태우고 5명을 부상시켰다.      


국권회복을 위해 창의한 의병 100여 명이 1908년 3월 언양읍성을 습격하여 12채의 건물이 불탔다. 언양읍성 내의 동헌과 객사 등 주요 관공서 대부분은 불에 탔다. 당시 토지대장도 불에 탔다. 1908년 의병의 습격으로 언양읍성의 정치 행정적 기능은 파괴되었다. 결국 읍성 안의 관공서 대부분은 읍성 밖으로 부분 이전하였다. 언양군수의 관사는 지금의 영화루 옹성에 지어졌다. 읍성 밖에 있던 사립영명학교는 읍성 안 동헌자리에 1913년 새건물을 지어 5월 1일 언양공립보통학교가 개교하였다. 건물은 아동문학가이자 민속학자 영문학자인 눈솔, 화장산인 정인섭의 부친 정택화의 기증이었다.      


1912년 언양읍성 지적도를 보면, 언양읍성의 땅들은 개인들의 사유지로 부분 등록되었다. 읍성의 남쪽 언양공보 부지와 건물지역은 국유지였다. 서문 근처 땅은 언양향교 소유였고, 북문쪽 아래 남쪽 일부의 논이 통도사 소유였다. 북성 동쪽 부분은 동척 소유지였다. 2000년에 조사한 결과, 언양읍성 안의 학교부지를 제외한 대부분은 개인 소유지로 바뀌었다. 그런데 체성 일부는 국공유지이고 경상남도 소유였지만 체성 위에 집을 짓거나 체성 일부는 텃밭이 되었다. 즉 성벽의 토성 부분은 계단식으로 갂아 밭으로 이용되었다. 성벽에 돌출시킨 적의 동태를 살핀 적대(敵臺) 또는 치성(雉城) 위에 집을 짓고 살림 생활을 하거나 마당 혹은 장독대로 사용했다. 지금도 언양읍성 서문 남쪽의 세명다이아몬드아파트 맞은 편 성곽에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성벽은 개인 집의 담장이 되었고, 또 일부 성돌은 언양의 여러 집의 담벽이나 다른 용도로 옮겨 사용되었다. 특히 1923년 언양읍성은 남쪽 성곽 돌들은 남천 제방을 쌓는데 사용되었다.    

  

▲ 1912년 언양읍성 토지 소유 현황

1919년 4월 2일 언양장날에 있었던 만세시위에서 긴급 출동한 경찰이 주동 인물들을 언양주재소로 강제 연행하자, 시위 군중들은 격렬한 투석전을 벌이며 주재소로 몰려갔다. 하지만 언양 성터에 올라간 경찰은 무차별 사격을 하였다. 이때 일본 군경의 총격이 빗발치면서 손입분(孫粒粉) 여사가 현장에서 순국했고, 곽해진의 모친 길천댁을 비롯해 남녀 5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언양남천은 여름철 비가 많이 오면 강둑이 무너지고 마을이 침수되었다. 대정 11년 9월 공사를 시작[起工]하여 1, 2기로 나누어 공사를 하였다. 1927년 3월까지 공사비 1만7천7백76원, 공사인원 1만7천여 명으로 호안(護岸) 연장 456칸이란 장사형(長蛇形)의 언양남천 제방공사를 하였다. 1927년 6월 12일 오전 11시 언양 남천호안공사 낙성식을 하였다. 제방에 사용된 돌은 언양읍성 남쪽 성벽의 돌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1936년 7월 31일 대홍수로 남천이 범람하였다. 이로인해 양산, 울산, 경주를 잇는 자동차 교통이 두절되었다.

    

▲ 언양읍성 서문 남쪽 적대 또는 치성 위에 지은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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