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상을 극복하고 나서 쓰는 글
잘 몰랐다.
투고를 하고 책을 내는 사람들은 다들 편집자님이 배정되어, 함께 더 좋은 방향에 대해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작가는 그 의견을 바탕으로 다시 수정하고, 디자이너와 마케터의 수고가 더해져, 그렇게 책 한 권이 나오는 줄 알았다.
그래서 투고 이메일을 돌려보고, 처음 받은 답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예약판매 기간 내에 250권, 500권, 또는 1,000권을 작가가 팔아야 한다는 조건이 붙은 제안. 제일 적은 A안(250권)을 선택하면, 해주는 거라고는 인스타그램에 한 장 올려주는 게 전부였다. 편집자가 있나? 글쎄, 그것도 모르겠다. 포괄적인 조언을 해주는 정도로 보였다. 기한도 3주 내로 정해져 있었다. 내 눈에는 마치 공장같이 보였다. 인쇄소 같은 공장.
근데 가만... 이 출판사 이름, 어딘가 낯이 익었다. 같이 글공부하는 모임에서 최근 두 작가님들이 책을 냈었는데, 바로 거기였다. 요즘 여기저기 책 냈다는 분들의 표지에 붙어있던 그 이름이기도 했다. 충격이었다. 다들 본인 돈을 내고 책을 내고 있었다고? 그래야 하는 거였다고?
그 뒤 몇 군데서 비슷한 제안을 더 받았다.
100권만 정가의 70% 가격으로 부담하는 곳도 있었고, 비슷하게 100권을 찍은 후, 다시 찍을 때는 정가의 40%를 다시 부담해야 하는 곳도 있었다. 350권을 제안한 곳도 있었으며(여기는 대표가 연락을 참 많이도 해왔다), 아예 자비출판이라고 말을 붙인 곳도 있었다. 어떤 출판사의 대표님은 요즘 현실이 그렇다고 친절하게 설명도 해주었다.
인플루언서도 아닌 내가, 브런치에서 대박 터진 글도 아닌 평범한 이야기로, 첫 책을 내는 현실은 그랬다. 내가 꿈꾸던 그런 출간 형태는 이 바닥에서 '기획출판'이라 했다. 그 이름을 이제야 알았다.
그래서 내상을 입었다.
돈을 내고 듣던 책 쓰기 강의에서, 이런 현실을 일절 말해주지 않은 채 '무조건 쓰라'고만 했던 것에,
글쓰기와 책 쓰기는 엄연히 다른데도 기획의 단계가 미미했다는 것에, 그래서 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는 것에,
초보작가에게 투자할 출판사가 별로 없다는 현실을 이제야 알았다는 멍청함에, 출판의 과정에 대해 유튜브조차 뒤져볼 생각을 하지 않았었다는 것에, 나의 무지함에,
편집자와의 소통을 꿈꾸며 달려온 내 시간들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썩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그만 포기하고 반기획 출간을 권하는 말에, 원래 처음은 다 그런 거라고 건네는 한 마디가,
마음속에 상처가 하나 둘 새겨졌다.
다른 동료 작가님들의 출간 소식에 들떴던 내 마음은 깊게 가라앉아버렸다.
의욕이 사라졌다. 애초에 굳이 출간을 하려는 이유도 이제는 알 수 없었다. 인정받고 싶었던 건가? 전업맘이라는 딱지가 싫어서? 브런치에 글을 올리는 쪽이 책을 내는 쪽보다 더 많은 사람에게 읽히겠는데, 굳이 책을 내야 할까? 썩 잘 쓰지도 못한 것 같은데, 읽을 사람도 별로 없다면 이렇게까지 책을 내야 하는 걸까? 그래서 툭- 모든 것을 내려놓으려고 했던 그때였다.
우연히 편집자로 오래 일했던 분이 손을 내밀었다. 기획서를 보며 부족한 부분을 짚어주며, 방향을 알려주었다. 다시 해보라고. 포기하지 말라고. 기획서부터 고치고, 그 방향에 맞게 목차 구성을 바꾸라고. 구성만 바꿔도 완전히 다른 책이 된다고. 투고했던 곳에 재투고 해도 괜찮다고. 1월이 투고하기 더 좋으니 지금 시간 가지고 다듬어보라고. 이렇게 끝까지 써낸 것 만으로 힘이 있는 사람이니 잘하고 있다고.
그럴 수 있을까? 너무 지치는데. 그냥 놓아버리고 싶은데. 글을 건든다고 뭐 더 나아질까?
손을 내밀어 준 사람에게 고마워서, 다시 해보고 싶어졌다. 해보지 않고는 모르는 법이니까. 할까 말까, 될까 되지 않을까, 고민만 할 때는 풀리지 않을 것 같은 일도, 막상 시작하면 더 이상 그건 고민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하기로 결정하고, 그냥 방법만 치열하게 생각하면 된다.
그래서 나는 다시 해보기로 했다. 12월에 치열하게 고쳐서, 1월에 다시 시도하기로.
해보는 데 까지는 해보고 싶다.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다. 비록 실패하더라도, 그래서 결국 반기획으로 내 돈을 들여 출간을 하는 일이 있더라도, 지금보다는 나은 글을 세상에 내놓는 일이 될 테니까. 그러면 적어도 나에게 부끄럽지는 않겠지. 경험은 남겠지. 이런 경험은 내가 치열하게 고민할수록 값진 것이니까.
그리고 그녀의 말이 맞았다. 콘셉트부터 다시 날카롭게 고민하고 또 고민했더니, 새로운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제 커피숍에 앉아 새로운 콘셉트에 맞게 목차를 손보았다. 견고해 보였던 6장, 40개의 목차를 와르르 무너트렸더니, 새로운 틀이 보이기 시작했다. 완전히 다른 모습인데, 훨씬 나아 보인다. 이제는 어디 내놓기가 조금 자신 있을 것 같다.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이 많다.
40개의 글 중에 32개는 그대로 가져가겠지만, 구성이 달라지고 콘셉트가 바뀐 만큼 모든 글을 손봐야 한다. 그리고 새로 채워야 하는 8개는.. 모르겠다. 다 채우지 못하면 80% 원고가 완성되었다고 하려고 한다. 그건 큰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에.
그렇게 나는 다시 도전을 시작한다.
남들처럼 적당히 타협하면 쉬울 텐데, 난 이렇게 돌아가기로 했다. 그게 나라는 사람이니까.
* 반기획을 폄하하려는 건 아닙니다. 쓰려는 사람은 늘어나고, 읽는 사람은 적어지는 게 출판계 현실이니 충분히 이해합니다. 다만, 저는 편집자 함께 고민하는 시간을 꿈꾸었기에 조금 더 헤보려는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