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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란 Oct 21. 2023

내 마음의 장벽

마음먹은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6개월의 질병휴직 기간을 마치고 복직을 한 것이 7월 초. 브런치에 마지막 글을 쓴 것이 7월 중순, 그리고 지금은 10월도 하순을 향해 간다. 책을 읽거나 전시를 보고 기록하던 다른 플랫폼의 블로그에도 임시저장해놓은 글감만 여러 개다. 여름내 한 편의 완결된 긴 글을 써본 적이 없다. 문득, 내 안에 글이 말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득하니 앉아 책을 읽어본 기억도 거의 없다. 브런치가 때때로 메시지를 보내왔다. 작가님의 이야기를 기다려요. 그럴 때마다 입술을 꽉 물었다 놨다. 나도, 기다리고 있어. 


그렇다고 달리기를 열심히 한 것도 아니다. 가을에 풀코스 마라톤대회에 첫 출전해보겠다고 마음먹어놓고, 여름내 하프코스 달리기조차 몇 번 해보지 못했다. 7월과 8월의 달리기 기록을 모두 합쳐도 200km는커녕 150km나 될까 말까 했다. 휴직기간과 복직 후 내게 달라진 건, 매일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고 퇴근한다는 것 하나였다. 예전 직장에 비해 거주지로부터 조금 더 멀어진 곳에 발령을 받아서, 출퇴근 시간이 휴직 전보다 조금 길어졌을 뿐이다. 그뿐이다. 


오래 고민하지 않고 풀코스 마라톤대회의 티켓은 다른 사람에게 양도했다.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로 섣불리 대회에 출전하는 건 무모한 짓이라는 판단이 들어서였다. 몸과 마음 안팎으로 고단해졌다. 여름내 인스타그램에 짤막한 낙서나 메모 따위만 중얼거렸다. 마치 만성 변비 환자가 된 기분이 들었다. 하고 싶은 말이 없는 건 아닌데, 이루고 싶은 일이 없는 건 아닌데, 왜 이러지. 답답했다. 어딘가 콱 막힌 기분이 들었다. 아무도 없는 곳에 혼자 가서 소리라도 왁왁 지르고 싶었다. 나는 왜 글을 못 쓰나. 왜 21km 이상은 달리지를 못하나. 


그러다 예전에 소설가 은희경이 어딘가에서 한 인터뷰가 떠올랐다. 소설 <태연한 인생>의 집필 배경에 대한 이야기였다. 창작촌에 들어가 글 쓸 준비를 하는데, 마감기한이 다가오도록 글이 떠오르지 않았다 한다. 속을 쥐어뜯고 또 쥐어뜯다가 결국 생각해낸 것이, 글을 쓰지 못하는 소설가의 이야기였다고 한다. 결국 <태연한 인생>은, 본인의 이야기였다. 비가 와서 달리기 모임이 취소되어 시무룩해진 어느 날, 문득 노트북을 켠다. 인터넷창을 연다. 글을 쓴다. 무슨 글을 써야 할지 모르는 채 앉아서 무작정 쓴다. 


마음이 괴로웠던 어느 날, 달리기 모임에서 만난 언니와 밥을(언니는 약간의 술도) 먹었다. 언니에게, 여름내 하프코스조차 몇 번 뛰지 못한 나를, 그래서 가을의 대회를 포기한 나를 자책하는 투의 이야기를 했다. 저는 왜 21km 이상을 달리지 못할까요. 1km만 더 달려도 최장거리를 넘길 수 있는데, 왜. 고작 1000m를 더 뛰지를 못할까요. 저는 풀코스 마라톤이라는 걸 해낼 수가 있을까요. 잘 하는 건 원하지 않아요. 그냥 제 몸이 견딜 수 있는지가 궁금해요. 언니는 대수롭잖다는 투로 말씀하셨다. 뭐 어때. 완주 못 해도 괜찮아, 모든 대회는 네 거야. 


왜였는지 모르겠는데 그 순간 눈이 무척 뜨거워져서, 괜히 앞에 놓인 물잔을 들었다 놨다 했다. 이상하게도, 내가 출전하는 모든 대회가 나의 것이라는 생각은, 첫 대회를 나갔던 2019년부터 지금까지 단 한번도 해본 적이 없다. 생각해보면 나는 늘 무언가로부터, 어딘가에서, 비껴나 있다고 느꼈다. 박수받기보다 박수쳐주는 사람이었다. 시선을 받기보다 바라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언니의 말이 종소리 같았다. 대회는 나의 것이구나. 더 생각해보면, 꼭 대회가 아니라도, 내가 내 몸으로 해내는 모든 달리기가 나의 것이다. 21km의 달리기든, 22km의 달리기든, 단 5km의 달리기든. 


그걸 왜 잊어버리고 있었을까... 답답했던 마음이 다 풀린 건 아니지만, 그래도 구름 낀 하늘 한쪽이 빼꼼 열린 것 같은 기분으로 집에 왔다. 어느덧 끝날 것 같지 않았던 여름이 끝났고, 복직한 지도 백여 일이 지나갔고, 점점 하늘이 깊어지고 공기가 서늘해진다. 달리기 좋은 계절이다. 조용히 책을 읽기에도 좋은 계절이다. 내 안에 글이 말랐다고 생각하면서도, 괜히 노트북을 켜고 인터넷창을 열어 글쓰기 버튼을 눌러보았다. 무슨 글을 써야 할지 모르는 채 앉아서, 잠자코 식은 커피를 마신다. 마음에 쌓아놨던 장벽을, 차마 허물지는 못하고 조심스럽게 기어올라가 보았다. 선뜻 기어올라가보니 그렇게 높지도 않았다.


어느 맑은 날에는 아주 천천히, 동네로부터 조금 멀리, 달려봐야겠다. 선선한 공기를 맞으며, 이따금 지나가는 사람들의 두런두런 말소리를 들으며 달리다보면 새로운 풍경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누구의 것도 아닌 나의 달리기다. 그러다보면 또 하나의 마음의 장벽을 기어올라가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언젠가는, 22km의 달리기를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선뜻, 해 보자. 문득, 해 보자. 먹구름 잔뜩 낀 하늘 한쪽이 툭 터져서, 푸른빛이 새어나오는 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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