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개월만에 깜빡이는 커서 앞에 앉아서
가끔, 깜빡 잠에 들었던 것도 아니면서, 그저 가만히 앉아만 있었을 뿐인데 꿈에서 막 깨어난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오늘 오후부터 저녁까지가 그랬다.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시간이 가면서 해가 저물고 창밖이 어두워지도록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했던 것은 같다. 무슨 생각들이었는지는 잘 기억도 안 난다. 아마도 썩 건설적이거나 생산적인 생각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긴 글을 쓰지 않은 지 약 10개월째인 것이 실감되고, 문득 다시 글을 써야겠다고, 이전보다는 조금 더 강하고 진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이렇게 10개월만에, 깜빡이는 커서 앞에 다시 앉았다. 처음 브런치 작가에 응모했던 때처럼, 막막하고 먹먹한 기분으로.
한동안 책을 읽는 것도 긴 글을 쓰는 것도 등한히 했다. 좋아하는 바깥활동들에 유난스레 몰입했던 것도 있고, 복직 후 회사생활이 정신없이 돌아갔던 탓도 있다. 무엇보다, 스스로를 깊이 들여다보는 것이 조금 두려웠다. 생각해보면 나는 늘 누군가로부터 어딘가로부터 도망치며 살았다. 타고나기를 예민하고 소심한 성정, 두드러지는 갈등에는 맞서기보다 피하는 성향, 그런 것들이, 나를 늘 한곳에 정주하지 못하는 인간으로 만들었다. 나를 아는 어떤 사람들은 내가 속이 없거나 한없이 착하거나 다정하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다가가기 어려운 벽이 있다고 한다. 결국 둘 다 나다. 사회적 세련미라는 게 영 떨어지는 인간. 그걸 외면하고 싶어서, 그렇지 않은 척 하고 싶어서, 글로부터 영 떨어져 살았다. 글은, 내게 영원히 흐릿한 거울이었으므로, 또는, 더러운 우물 밑바닥이었으므로.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런 나를 변함없이 위로하는 것도 글뿐이었다. 어느 누구에게도 그 어떤 것도 일절 이해받지 못한다는 기분이 들 때, 광막한 우주에 홀로 선 느낌으로 오도카니 서거나 앉아있을 때, 글만은 내 손 닿는 어디에나 있었다. 설렘과 옅은 슬픔 속에서 한강의 <희랍어 시간>을 생각했고, 두려움과 아픔 속에서 코맥 매카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떠올렸다. 글을 읽고 떠올리는 것만은, 아무리 심신이 지치고 고단해도, 언제고 어디서고 할 수 있었다. 그 사실만이 먼 데서 깜빡이는 등대 불빛처럼 남아있던 때, 문득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다시 스스로를 구원해 봐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을 때. 어떤 글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는 아직 모르겠다. 긴 글을 써본 지 오래되어 비문이나 어색한 흐름을 피해야 한다는 감각도 희미해졌다. 그러나,
의지가 있다. 사방이 어둠인 곳에서 홀로 켜져 있는, 힘없이 흔들리는 촛불처럼 딱 한점 남아있는 의지가. 그 희미한 의지가 손바닥 안에서 어린 새처럼 떨고 있다. 미약한 온기를 갖고서. 그것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쓴다. 커서 앞에 앉아 무작정 손가락들을 움직이며, 흰 화면 앞에서 눈을 흡뜨고, 어지러운 이 마음들이 가는 곳을, 그것들이 남기는 지저분한 흔적들을 단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처음 브런치 작가 제안을 받고 글을 쓰던 밝고 맑은 마음과는 영 다른 결의 마음이다. 조금 더 처절하고 서글프고 진한 마음이다. 고개 돌리지 않고 오래 바라본다. 광막한 우주에 혼자 있더라도, 혼자가 아니다. 이 손에, 글이 남아있다, 아직. 그걸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천천히 다시 생각해보기로 한다. 삶은 아직 지겹게 많이 남아있고, 나의 손과 눈은 아직 건강하며, 내가 들여다봐야 하는 못나고 어려운 마음이 너무나도, 너무나도 많이 있다. 내 앞에.
한강의 <희랍어 시간> 맨 마지막 장 맨 마지막 두 문장은 이렇다. '마침내 첫 음절을 발음하는 순간, 힘주어 눈을 감았다 뜬다. 눈을 뜨면 모든 것이 사라져 있을 것을 각오하듯이.' 다시 커서 앞에 앉는 마음이 꼭 그렇다. 눈을 떠 다시, 마음을 들여다볼 때다. 흐린 거울에 비친 나를 오래도록 바라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