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3시 무렵.
사무실은 대체로 잔잔했지만, 박 상무 자리만은 묘하게 긴장된 기류가 감돌았다. 모니터 두 대에는 서로 다른 표와 그래프가 번갈아 깜빡였고, 책상 위에는 인쇄된 자료 뭉치가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박 상무는 화면을 확대했다 줄였다 하며 표와 숫자를 오가고, 메모장에 무언가를 빠르게 적어 내려갔다. 내일 사장님께 올릴 보고서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듯했다.
그때 조용히 울리는 메일 수신음.
박 상무가 잠시 모니터를 훑어보더니,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처음엔 화면을 잘못 본 건가 싶었는데, 눈가에 깊은 주름이 잡히더니 한숨이 섞인 짧은 탄식이 나왔다.
“아씨...”
그 말은 아주 낮았지만, 책상 사이로 묘하게 퍼졌다.
그는 고개를 들더니 짜증이 가득 섞인 목소리로 김 부장을 불렀다.
“이게 뭐예요?"
김 부장은 전혀 감을 잡지 못한 채, 곧장 박 상무 자리로 갔다. 화면 옆에 서서, 마우스를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아, 이게요... 여기 보시면요, 지난주 보고 때 이 항목이 변경됐습니다. 그래서 여기 수치가 이렇게 바뀌었고요...”
뭔가 주눅 든 말을 잇는 동안, 손끝이 그래프의 꺾이는 지점을 따라갔다.
“이 부분은 신규 데이터를 반영해서 추가했고, 아래 주석은 비교를 위해 달아 둔 겁니다.”
박 상무는 말없이 화면을 응시했다. 턱을 괸 손가락이 천천히 관자놀이를 눌렀다. 설명이 끝나자, 그는 다시 말했다.
“아니, 그래서... 지금 이게 맞아요?"
두 번째 질문.
김 부장은 잠시 멈칫했고, 표정이 조금씩 굳어지기 시작했다.
“아, 네. 그러니까 이게...”
그는 마우스로 표를 가리키며 설명을 조금 더 세세하게 풀었다.
“이 숫자는 신규 프로젝트 건수를 반영한 거고요, 여기 빨간 표시 보이시죠? 이건 비교를 위해 임시로 넣어둔 겁니다.”
말은 매끄러웠지만, 설명 속도가 미묘하게 빨라졌다.
박 상무는 여전히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시선은 화면에 고정된 채, 목소리만 낮게 나왔다.
“아니, 그래서... 어쩌자고?”
세 번째 질문.
김 부장의 얼굴은 서서히 상기되기 시작했다. 김 부장이 다시 마우스를 움직이며, “그러니까 이게...” 하고 설명을 이어가려는 순간, 박 상무의 전화기가 울렸다.
“아, 전무님, 네네... 잠시만요 자리 좀 옮기겠습니다.”
그는 자리를 비우고 회의실 쪽으로 걸어갔다. 그가 사라지자, 김 부장은 다급히 이 차장과 최 과장을 불렀다.
“이 차장! 최 과장! 큰일 났어, 빨리 여기로 와봐! 상무님한테 보낸 자료가 좀 잘못된 거 같아!”
작업을 마치고 밖에서 잠시 숨을 고르던 두 사람은, 허둥지둥 모니터 앞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원본 파일을 열어, 항목 하나하나를 다시 대조하기 시작했다.
“여기 수치 맞아요?”
“잠깐만요, 강 대리한테 다시 확인해 볼게요.”
곧이어 강 대리까지 합류해, 자료를 뒤지고 프린트를 뽑고 키보드를 두드렸다. 누구도 정확한 원인은 모른 채, 숫자와 문장을 샅샅이 검증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어디가 틀린 지 발견하지 못했다.
폭풍 같은 30분이 지난 후, 박 상무가 돌아왔다.
"아참, 김 부장님, 아까 그 자료 말인데..."
김 부장이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조심스레 물었다.
"네 상무님, 좀 전까지 자료 다시 검토해 봤는데 크게 잘못된 부분은 없었습니다만... 혹시 어떤 것 때문에 그러시는지요?"
박 상무가 의자에 앉으며 대답했다.
“아니, 이걸 지금 와서 보내면 어떡해요. 자료 다 정리해서 전무님한테 메일 보내기 바로 직전이구만. 일단 알았어요, 다음번엔 미리미리 좀 보내주세요.”
순간, 사무실 공기가 서서히 꺼져내리는 듯했다. 김 부장은 짧게 헛웃음을 흘렸고, 이 차장은 의미 없이 두드리던 키보드를 멈췄다. 최 과장은 작은 한숨을 삼키듯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래도 소득은 있었다. 보고서 첫 페이지에 있던 '데이타'를 '데이터'로 고친 것.
가끔은 회사에도, 사람 사이의 미묘한 속뜻을 풀어주는 번역기가 하나쯤은 필요할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