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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고생의 전통

by 만숑의 직장생활

“휴가? 그런 거 꿈도 못 꿨어. 프로젝트 끝나야 겨우 하루 쉬었어.”
“요즘은 시스템이 다 해주지? 우린 손으로 다 했어.”
“나는 그렇게 부딪히면서 배웠어. 그래서 지금의 내가 있는 거야.”

회사는 이상할 만큼 ‘고생’의 서사를 사랑한다. 누군가 힘든 프로젝트를 마치면 “이제 너도 일 좀 배웠겠구나”라는 말이 따라붙고, 잔인한 일정과 부당한 요구도 “네 커리어에 도움이 될 거야”라는 말로 포장된다. 이 서사는 너무 익숙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이 문제인지조차 생각하지 않는다. 마치 성장이란 반드시 상처와 맞닿아 있어야 한다는 듯이.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 믿음에는 묘한 구조가 숨어 있다. 회사는 고통을 ‘성장’으로 번역함으로써 조직의 책임을 개인의 경험으로 돌린다. 일정이 무리해서 야근을 반복해도, 지원이 부족해 혼자 떠안아도 “덕분에 많이 배웠잖아”라는 한마디면 모든 불합리함이 미묘하게 봉합된다. 문제는 구조인데, 서사는 개인의 성장담으로 바뀌고, 결과적으로 아무도 시스템을 고치지 않는다. 고생이 개인의 ‘성장’으로 끝나는 순간, 구조는 영원히 방치된다.

이런 문화가 의도적으로 설계된 건 아닐 수도 있다. 다만 오래된 조직일수록 이런 패턴이 굳어진다. 선배들은 자신이 겪은 고생을 자랑스럽게 회상하고, 후배들에게 같은 길을 걷게 한다. 상처를 증명처럼 들이밀며 “우리 때는 다 그렇게 했어”라고 말한다.
이렇게 세대 간에 ‘고생의 전통’이 만들어지고, 어느 순간 그것은 검증된 성장 방식처럼 굳어진다. 그 과정에서 진짜 중요한 것들이 묻힌다. 그 고생이 정말 필요했는지, 구조적으로 개선할 수는 없었는지, 애초에 다른 방식의 성장은 가능하지 않았는지 말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런 문화가 리더십의 본질을 왜곡한다는 점이다. 좋은 리더는 팀원들을 고통 속에 던져놓고 “잘 버텨냈네”라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애초에 불필요한 고통을 만들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데 고생이 곧 성장이라는 인식이 박힌 조직에서는 이런 리더십이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오히려 “편하게 일했다”는 이유로 평가가 박해질 수도 있다. 역설적이게도 ‘좋은 환경’은 성장을 가볍게 만들어버리는 이상한 문화가 생긴다.

이런 구조에서는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방식’보다 ‘고통스럽고 눈에 띄는 방식’이 더 인정받는다. 무리한 일정을 버텨낸 사람이 칭찬받고, 조용히 시스템을 개선해 고생을 줄인 사람은 티도 나지 않는다. 조직은 고통을 낭비하면서 성장했다고 착각하고, 사람들은 불필요한 상처를 떠안는다.

결국 이 문화는 사람들의 태도에도 스며든다. 고생을 자랑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상처를 견딘 경험이 발언권이 된다. “나 때는 말이야”가 자연스러운 권위가 되고, 회사의 대화 구조는 상처의 양에 따라 비틀어진다. 상처를 많이 받은 사람이 말을 많이 하고, 덜 받은 사람은 조용해진다.

나는 진짜 문제가 상처 자체가 아니라, 상처를 기준으로 삼는 문화라고 생각한다. 성장의 잣대가 고통에 고정되는 순간, 조직은 다른 가능성을 잃는다. 좋은 환경에서 성장한 사람은 ‘운 좋은 사람’으로 취급되고, 나쁜 환경을 견딘 사람은 ‘진짜 성장한 사람’으로 떠받들어진다. 이것은 성장에 대한 왜곡된 서사다.

회사는 결국 성과와 배움이 교차하는 곳이다. 그런데 그 성과와 배움이 반드시 고통과 짝을 이뤄야 할 이유는 없다. 불필요한 고통이 줄어든 자리에는 다른 방식의 성장이 들어올 수 있다. 효율적인 시스템, 건강한 협업, 합리적인 리더십, 그리고 잔혹한 서사가 필요 없는 배움의 경험 말이다.

성장을 고통으로 증명하는 문화는 오래된 갑옷 같다. 과거에는 그것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그 갑옷이 오히려 움직임을 방해한다. “고통이 성장을 만든다”는 말은 어쩌면, 고통을 줄일 생각을 멈추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주문일지도 모른다.

이제는 다른 방식의 성장을 더 자주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넌 얼마나 힘들었어?”라는 말 대신 “그 경험에서 뭘 배웠어?”라고 묻는 환경. 성장은 반드시 상처를 동반해야 한다는 믿음에서 벗어나, 배움이 자연스럽게 쌓이는 조직.

결국 성장이라는 건 그렇게 거창한 서사가 없어도 조용히 일어나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요즘 ‘고생’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한 번쯤 멈춰서 생각한다. 그것이 정말 필요한 고생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너무 오래된 풍경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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