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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혜미 Jul 14. 2023

일곱 살의 여름

흠뻑 젖어도 괜찮아!

일요일 오후. 한바탕 대청소로 오전 시간을 보내고 이제 좀 소파에 누워 느긋한 오후 시간을 보내려는데 어린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심심하다며 난리를 피웠다. '김해가야테마파크'라고 가고 싶은 목적지를 꽤 구체적으로 요구했으나 일요일은 다음 날 출근을 위해 체력을 아껴놔야 하니 가까운 어린이 도서관에 가자고 했다. 재미없다고 입이 튀어나올 줄 알았는데 '좋아요!' 하고 소리치고는 방방 뛰었다. 주차하는 시간까지 계산해도 1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을 정도로 가까운 시립 도서관인 데다가 처음 가보는 곳도 아니어서 특별할 것 하나 없는데 어린이는 옷장 앞에서 어떤 옷을 입을지 고민이었다.  


대충 입고 가자고 해도 방에서 한참 낑낑 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평소에 잘 입지 못하는, 어깨가 드러나는 셔츠 원피스에 진주 목걸이를 목에 걸고 나타났다. 도서관의 에어컨 바람이 차가울 것 같아 원피스 안에 티셔츠를 입혀준 다음 집을 나서려는데 리본 핀까지 하고 싶다고 해서 신었던 신발을 다시 벗고 분홍색 핀을 찾아 머리에 찔러주었다. 한껏 멋을 부리고 신발장에서도 걸을 때마다 반짝반짝 불빛이 나는 샌들을 골라 신고 폴짝폴짝 뛰었다. 막 대청소를 끝내 깨끗하고 잘 정돈되어 있는 집에 대자로 한번 누워보지도 못하고, 아쉬운 마음을 접어두고 현관 문을 닫았다.   


"셋이서 놀러 가니 정말 좋아요." 


토요일인 어제 주말 출근으로 아빠와 하루종일 놀았던 어린이가 오른손엔 내 손을, 왼손엔 남편 손을 꼭 잡고는 환하게 웃었다. 다음 주말엔 시간을 내서 조금 먼 곳으로 나들이를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했다. 계단을 기분 좋게 발맞춰 걸었다. 


일요일 어린이 도서관은 제법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초등학생 3학년쯤 되어 보이는 여자 아이가 엄마와 책상에 나란히 앉아 각자 책을 한 권씩 읽고 있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언젠가 나도 어린이와 저렇게 책을 읽고, 도서관을 나가면서 서로 어떤 책을 읽었는지 이야기하는 날이 올까. 제법 근사한 상상의 나라에 빠지려는데,


"안녕 얘들아~!" 


도서관의 적막을 깨고 큰 소리로 인사하는 어린이 덕분에 얼른 현실로 돌아왔다. 지금은 서로 조용히 책을 읽기보다는 도서관 예절을 더 많이 가르쳐야 할 때. 아는 친구를 만나 반가운 어린이를 조금 진정시키고 주위를 둘러보라고 귀에 대고 속삭였다. 여기는 어린이 도서관이라서 아주 조용히 하지는 않아도 되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고 있으니 방해를 하면 안 된다고 차근차근 설명했다. 일곱 살, 그래도 어느 정도의 사회생활 경험이 있는 나이라 주위 눈치를 보더니 얼른 목소리를 낮췄다. 


주렁주렁 진주 귀걸이를 휘날리며 영어도서관 자유 열람실에 있는 미끄럼틀을 신나게 탔다.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읽어봐, 하니 글이 얼마 없는 책을 몇 권 뒤적거리다가 금세 흥미를 잃고는 눈에 보이는 책을 들고 와 읽어달라고 했다. 열심히 읽어주고 있는데 옆에 진득하게 앉아서 듣지 못하고 일어나 내 주위를 맴돌았다.


"얌전히 앉아서 책 읽어야지." 


"스스로 책 읽게 놔두지. 그렇게 잔소리하면 도서관에 대한 흥미도 잃겠다."


여태 도서관 구석에서 폰 게임만 하고 있었던 남편이 육아 훈수를 두는 바람에 마음이 상해 읽던 책을 덮고 자유 열람실을 나가버렸다. '아빠가 읽어줘~'하는 소리가 뒤통수에 들렸다. 아까 봤던 책 읽는 모녀가 보였다. 어떻게 하면 아이가 그렇게 얌전히 책만 봅니까, 하고 아이 엄마를 붙잡고 육아 노하우를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무슨 책을 읽고 있나 힐끔 보려다가 괜히 방해가 될까 싶어 책꽂이 사이로 고개를 돌렸다. 


한 권, 한 권 대충 살펴보다가 번뜩 최근 재밌게 읽고 있는 [어린이라는 세계] 작가가 추천해 준 책들이 생각나 자료 검색대로 갔다. 도서 위치와 책 번호를 외우고 다시 책을 찾으러 갔다. 책의 번호를 살피며 점점 내가 찾는 책이 가까워지는 느낌이 좋았다. 멀리서 보면 책의 색도 규격도 달라 어지럽게 꽂혀있는 것 같지만 가까이 보면 아주 잘 정리가 되어있다. 여기쯤 있을 것 같을 때 찾는 책이 보이면 마치 그 책이 책꽂이에서 튀어나온 것 처럼 신기하다.


얇은 동화책 한 권을 찾아 어린이와 남편이 있는 열람실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읽었다. 남편은 내가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 것을 눈치챘는지 살뜰하게 어린이를 챙기며 책을 읽어주었다. 내가 골라온 책은 [꼬마 너구리 요요]. 한 줄씩 읽어나가니 금방 책에 빠져들었다. 어린이의 마음을 잘 헤아리는 글이 따뜻했다. 책이 얇아 금방 읽고 옆을 보니 뛰어놀고 싶어 온몸이 베베 꼬인 어린이가 보였다. 


"그만 갈까."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어린이가 읽던 책을 덮고 일어났다. 책 세 권을 빌려가자고 하니 대충 눈에 보이는 책 한 권을 꺼내길래 내가 책을 추천해 주겠다고 했다. 셀프 대여대에 가서 빠르게 책을 빌린 뒤 도서관을 빠져나왔다. 


시간은 어느새 훌쩍 흘러 4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장마철이라 하늘에는 구름이 가득하고, 습하고 더운 바람이 불었다. 많이 놀지 못해 아쉬운 발걸음으로 다시 차를 타러 가는데 가까운 곳에서 시원한 물줄기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빼고 살펴보니 도서관 앞 작은 분수대에 물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몇몇 아이들이 놀고 있는 소리가 들려 어린이 손을 잡고 분수대로 가니 어린이 무릎 높이 정도로 낮은 물이 올라오고 있었다. 어린이가 홀린 듯이 반짝이는 샌들을 바닥에 벗어놓고는 말릴 틈도 없이 맨발로 분수대에 들어갔다. 분수대 끝을 발가락으로 조심스럽게 건드리려는데 분수대 물이 갑자기 하늘 위로 높이 솟아올랐다가 떨어졌다. 반듯하게 찔러두었던 분홍색 머리핀도 비뚤어지고, 낑낑거리며 차려입었던 옷도 흠뻑 젖었지만 어린이가 우리를 보며 큰 소리로 웃었다. 어린이는 이제 높이 솟아오른 분수대 사이를 맨발로 뛰어다니고, 두 팔이 춤추듯 팔랑거렸다. 


"옷 가지러 갔다 올게." 


아이가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돌보는 것은 부모의 일. 분수대에서 뛰어노는 즐거운 모습을 눈에 담고 싶었지만, 나는 마음이 급해져 얼른 차에 올랐다. 커다란 수건과 속옷과 옷을 챙겼다. 곧 비가 내릴 것처럼 바람이 불어 도서관 주차장에 주차를 하자마자 분수대까지 수건을 들고 뛰었다. 


"너무 추워요." 


고작 20분 정도밖에 놀지 않았는데 어린이가 물에 빠진 생쥐꼴로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제 몸만 한 수건을 몸에 두르고 머리와 얼굴에 묻은 물을 얼른 닦아주었다. 눈썹에 고인 물을 쓰윽 닦고 나니 장난기 가득한 눈 코 입, 어린이의 표정이 그제야 보였다. 


"재밌었어?"


"응! 진짜 진짜 재밌었어!" 


남편이 얼른 아이를 안아 차 안으로 들어갔다. 좁은 차 안에서 젖은 옷을 갈아입기 힘든데도 뭐가 그렇게 재밌고 즐거운지 어린이가 계속 웃었다. 웃느라 옷을 제대로 못 입길래 바지 좀 똑바로 입어, 하는 소리에 평소처럼 점프를 하다가 차 천장에 머리를 박았다. '통'하는 소리가 났는데도 아프지 않은지 웃음소리는 점점 커졌다. 겨우 옷을 다 입고 서늘해진 팔과 다리를 쓰다듬다가 감기에 걸릴가 싶어 번쩍 들어 무릎에 앉혀 꼭 안았다. 


책 읽기를 좋아하지 않아도 괜찮아. 

아직 도서관 예절 지키는 것이 서툴러도 괜찮아. 

얌전히 앉아있지 않아도 괜찮아.

분수대가 보이면 옷이 젖는 걸 걱정하지 않고 뛰어들어도 괜찮아.  

흠뻑 젖어도 괜찮아. 


내 엄지 손가락만 했던 발이 언제 자라서 이제 한 손에 잘 잡히지도 않았다. 제법 커다란 발을 내 입에 가져가 두세 번 입을 맞추었다. 간지러운지 하하 웃다가 내 품으로 파고드는 어린이를 다시 꼭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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