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arao Kim Jun 09. 2024

런던유학생 리차드(영화 '촌철살인')

'장맛보다 뚝배기'인 세상, 겉이 번지르르하지 않아 슬픈 리차드


청년 실업이 여전히 문제인 시대다. 취업의 문은 갈수록 좁아지고 경쟁은 치열해진다. 그러다 보니 이력서 구성요소조차 논란거리가 된다. 외모나 학벌로 판단이 불가하도록 사진 부착과 학력 기재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한 때는 연예인들의 학력 위조 문제로 세상이 떠들썩하기도 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학력과 무관하게 끼와 능력으로 인정받아야 할 연예인들조차 학벌에 연연하게 만들었다. 정말 외모나 학벌이 사람의 능력을 평가하는 기준이 될 수 있을까? 본질과 무관한 요소들이 본질에 대한 판단을 뒤바꿀 수도 있을까? 

제4회 대단한 단편영화제 상영장 4편을 모아 개봉한 영화 <촌철살인> 중 두번 째 에피소드인 이용승 감독의 <런던유학생 리차드>는 질문에 ‘Yes’라고 답한다. 세무공무원 준비생인 ‘동석’과 자칭 런던유학생인 ‘태인’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왜곡된 판단을 쉽게 하는지 보여준다. 

런던의 LBS 유학생 태인은 성실하고, 믿음직스러우며, 능력 있는 사람이다. 사무장에게는 월말정산 업무까지 믿고 맡길 수 있는 ‘배운’ 아르바이트생이다. 동석에게는 만난 지 채 하루가 안 됐음에도 ‘끝나고 맥주 한 잔 하고 싶은 형’이다.

나이트클럽 웨이터 리차드는 불성실하고, 믿을 수 없으며, 무능력한 사람이다. 사무장에게는 박스 하나 제대로 정리 못하는 ‘머리 못 쓰는’ 아르바이트생이다. 동석에게는 업무 노하우조차 전수받고 싶지 않은 ‘병신 같은 새끼’다.

사람을 속이는 행위는 유쾌하지 못한 일이다. 상대방에게 실망과 배신감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반드시 비윤리적인 행위는 아니다. 태인의 거짓말에 선의가 있었다거나, 그로 인한 결과가 좋았던 것은 아니지만 반대로 악의가 있어 타인에게 피해를 준 것도 아니다. 유학생이건 웨이터건 묵묵히 자기 할 일을 성실히 했다. 태인이 유학생이었기에 부당하게 이득을 본 적도 없고, 웨이터였기 때문에 동석이나 회사가 손해를 본 것은 없다. 태인의 신분에 따라 변한 건 동석과 사무장이 그를 대하는 태도뿐이다.

심지어 태인이 유학생이 아니라는 것도 확실히 증명되지 않은 사실이다. 사무장에게 했던 말처럼 런던에서 가족과 함께 살며 유학하던 중 혼자 한국에 온 것일 수도 있다. 그러다 잠시 웨이터 일을 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머리 못 쓰는 병신 같은 새끼의 말을 동석과 사무장은 믿지 않는다. 태인이 유학생일 가능성은 그들에게 0%다.

선입견은 진실을 왜곡시킨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보이는 것을 못 보게 만든다. 이력서에 부착된 증명사진 한 장에, 기재된 학력 한 줄에 능력에 대한 평가가 바뀔지도 모른다. 선입견을 버리고 객관적으로 사태를 바라볼 때 진실에 다가갈 수 있고 제대로 된 판단이 가능하다. 우리가 끊임없이 스스로를 의심하고 관찰해야 하는 이유다.

‘뚝배기보다 장맛’이라는 표현이 있다. 겉모습보다 실속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하지만 뚝배기가 허름하다고 장맛을 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계속해서 런던유학생들은 늘어나게 될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왜 독립영화 감독들은 DVD를 주지 않는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