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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rao Kim Jul 24. 2024

더 레슬러

로빈의 랜디 도전기

도전은 젊은이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지곤 한다. 젊을 땐 아무것도 잃을 게 없기 때문에 도전할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도전은 선(善)으로 가치가 매겨지곤 한다. 도전하는 삶은 아름답다고 입을 모은다. 하지만 삶을 아름답게 만드는 도전이 아닌, 도전하지 않으면 추해지는 삶. 늙어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도전할 수밖에 없는 삶. 대런 아로노프스키가 감독한 2009년 개봉작 <더 레슬러(The Wrestler)>가 그려낸 삶이다. 이를 통해 진정한 도전의 의미를 되새긴다.

복수는 복수를 낳듯, 도전은 도전을 낳기도 한다. 정확히 말하면 도전은 성공과 동시에 상실을 낳고, 상실은 다시 도전으로 사람을 내몬다. 랜디 더 램 로빈슨(이하 랜디)은 젊은 시절 잘 나가는 레슬러였다. 그를 형상화한 피규어는 물론, 그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게임 타이틀도 존재한다. 비록 나이가 들어 지역의 조그만 독립단체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젊은 프로레슬러들에겐 존경의 대상이다. 여전히 메인 이벤터로 나서며 관객들의 환호를 먹고 산다. 며칠 뒤에는 최전성기 시절 동료들과 함께하는 추억의 매치 행사에서도 파이널을 장식할 예정이다. 최고가 되기 위해, 영원한 레슬러가 되기 위해 무수한 도전을 해왔음은 역설적이게도 그가 잃은 것들로 알 수 있다.

레슬러로서 몸을 유지하기 위해 했던 과도한 운동과 약물 섭취, 경기 후 고통을 잊기 위해 복용한 진통제는 그에게서 건강을 빼앗았다. 링 위에서는 육중한 몸을 자랑하지만 링 밖에서는 돋보기안경과 보청기에 의지해야 한다. 그럼에도 더 많은 것을 보여주기 위해 과격한 하드코어 매치를 진행하다 결국 심장마비까지 겪게 된다. 레슬러로서 작별을 고할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최고가 되기 위해 쏟았던 열정과 시간은 가족을 빼앗았다. 아내는 떠났고 가출한 딸 스테파니는 아빠를 경멸하며 만나주지도 않는다. 집세도 내지 못해 낡은 밴에서 혼자 잠을 청하기도 한다. 어렵게 마련한 돈으로 되찾은 허름한 집에는 적막만이 흐를 뿐이다. 죽을 뻔했는데도 그 사실을 털어놓을 사람은 자신처럼 한물간 늙은 스트립 댄서 캐시디뿐이다. 외로움과 그리움은 일상이 됐다.

레슬링을 할 수 없는 레슬러. 가족을 잃은 아버지. 랜디는 더 이상 열정만으로 자아를 실현할 수 없다. 열정을 위한 도전을 할 수 없다. 하지만 잃어버린 것들을 위해 용기 있는 도전을 진행한다. 캐시디와 상의 후 좋은 아버지가 되기로 한 것.

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작은 선물을 준비한다. 딸아이에게 선물 한번 제대로 해준 적 없던 아빠로서 큰 도전인 셈이다. 또한 병든 상태로 딸에게 부담을 줄 수 없어 은퇴를 선언하고 마트에 파트타이머로 취업한다. 링 위에서 덩치들과 육탄전을 벌이던 레슬러로써 장 보러 온 주부들을 응대하며 샐러드를 담아주는 일은 용기 있는 도전이다. 비록 위생 헤어캡과 앞치마, 본명인 ‘로빈 램진스키’ 명찰패를 단 부끄러운 모습에, 매니저는 자신을 깔보고 조롱하지만 꿋꿋하게 적응해 나간다.

아쉽게도 새로운 도전은 실패로 끝난다. 순간의 감정 때문에 딸에게 다시 상처를 주게 된다. ‘더 이상의 기회는 없다’고 울부짖으며 자신을 내쫓는 딸에게 랜디는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도전을 부추겼던 희망도 사라졌다. 실패해도 다시 도전할 수 있는 영광이 랜디에게는 없다. 랜디는 앞치마에 달린 로빈 램진스키의 이름표를 떼는 것으로 어설펐던 도전을 끝낸다.

영화는 의도적으로 랜디의 뒷모습을 자주 비춘다. 덕분에 랜디는 관객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자꾸 멀어져 간다. 관객은 그 뒤를 쉬지 않고 쫓으며 간격을 유지한 채 늙은 레슬러가 숨기려 했던 초라한 삶을 숨죽여 목격하게 된다. 초라한 도전과, 그보다 초라한 결과는 뒷모습에도 표정을 부여한다. 노란 웨이브 금발머리와 육중한 어깨에서 고단함이 느껴지는 이유다.

모든 것을 잃은 거나 다름없는 랜디. 그야말로 잃을 것이 없기에 마지막 도전에 나선다. 바로 건강 때문에 포기했던 전설의 매치에 다시 참가하게 된 것. 캐시디가 만류해도, 몸이 성치 않아도 랜디는 관중들의 환호 속에 링 위에 오른다. 고통스러운 심장을 부여잡고 사각링을 누비지만 그 순간만큼은 마트 매니저에게 무시받던 로빈 램진스키가 아니라 모두에게 사랑받는 레슬러 랜디 더 램 로빈슨이 있다. 딸에게 상처만 주던 못난 아빠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슈퍼스타 랜디 더 램 로빈슨만이 존재한다.

랜디의 마지막 도전이 성공으로 끝났는지, 실패로 끝났는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마지막 도전이 숭고하게 비춰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도전이 아니라. 열정이 이끄는 순수한도전이었기 때문이다. 도전의 본질은 무언가를 얻거나. 잃게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에 지나지 않음을 랜디를 통해 보여준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인 듯하지만 매순간이 도전의 연속인지도 모른다. 선택지는 두 개다. 마트의 로빈 램진스키와, 사각링의 랜디 더 램 로빈슨. 당신은 어떤 무대에 도전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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