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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하고 싶다. 이곳에서

어디서든 디자인하고 싶은 사람

by 글쓰는 디자이너


이곳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매일 그 생각을 한다.

언어의 장벽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 한정적이라 처음 두 주는 답답하고 짜증이 나기도 했다. 언어가 전부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되어야 실수를 줄이고, 긴장감 없이 일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언어는 중요하다.


가끔 18년 전 상하이에서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생각한다. 그때의 나는 어떻게 상하이에 적응했었는가? 중국어도 못 하던 내가 어떻게 새로운 사람들과 친해졌을까? 어떻게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을까? 그 시절이 너무 오래된 것 같았는데, 어느 시점의 일들은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그때의 나에게 딱 맞는 말이었다. 아무것도 몰랐기에 두려움 없이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사람들에게 말을 걸었다. 하나둘씩 나뭇가지를 모으면서 새로운 삶의 둥지를 만들고 있었다. 당시엔 스마트폰도 없었고, 카카오톡 같은 것도 없었다. 오직 상하이라는 도시에 완전히 적응해야만 했다. 한국에 있는 사람들과는 한 달에 한 번 국제전화 카드로 연결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현지화될 수밖에 없었던 그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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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나에게는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 바로 내 포트폴리오. 2년 차 디자이너로서는 그다지 많은 작업물이 있진 않았다. 하지만 2년 동안 했던 ‘Room Project’를 모아 작은 책을 만들었다. 매주 방의 콘셉트를 정하고 달라지는 나의 방을 사진으로 찍어 책으로 엮었다. 단순히 사진만 넣기엔 나의 캐릭터가 보이지 않아서 아이디어 북을 통째로 스캔해 넣었다. 남들이 보기엔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그 작업들은 나만이 가진 보물들이었다. 생각하고, 관찰하고, 그 과정 속에서 나는 인내하고.


그리고 지금, 나의 무기는 무엇일까?

여전히 드로잉 스케치북이지만, 이제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내 캐릭터가 살아있는 포트폴리오가 필요하다. 사실 그 작업은 잠시 멈췄다.

새로운 삶에 조금씩 적응하고, 42개월 아기를 돌보며 소셜 미디어를 다루고 있다 보니, 포트폴리오를 완성할 시간은 아직 없다. 그래서 아침마다 30분씩 드로잉을 하며 손을 풀고 있다. 그저 낙서를 하며 느낀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지금은 나에게 필요하다.


한 번에 잘하려고 하면 오히려 병이 난다. 조금 천천히 해도 된다.


내 마음은 디자인에 진심이다. 예쁜 것, 새로운 것들을 보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 과정을 상상하며 머릿속으로 풀어본다. 마흔다섯이지만, 나는 여전히 디자인을 포기할 수 없다. 그동안 디자이너로 살아왔고, 잠시 육아로 쉰 적이 있지만, 그것이 나의 본질이 변화시킬 수는 없다. 앞으로도 디자인을 하며 살아갈 것이다.


프랑스에서라면 그게 가능할 것 같다. 젊음과 연륜이 공존하는 이곳에서, 나는 더 많은 가능성을 열어갈 수 있을 것 같다. 나만의 디자인 세계를 더 발전시킬 수 있고, 다양한 문화와 환경을 경험하면서 내 작품에 더 많은 깊이를 더할 수 있다. 나만의 이야기를 담은 디자인에 그것을 세상과 나누고 싶은 마음이 크다. 여기서 나는 새로운 삶을 만들어가고 있다. 디자인을 통해서, 그리고 그 안에서 나 자신을 다시 발견하며 살아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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