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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Jul 03. 2024

비가 와도 행복한 우리

아직은 낭만이야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순간을 소중한 친구와 나눌 수 있을 때. 같은 풍경을 바라볼 수 있을 때.

그럴 때 행복을 느끼는 것 같다.



밴드를 좋아하게 되면서부터 여름이나 가을쯤 뮤직 페스티벌에 한 번씩 가고 있다. 특정 밴드를 보러 가기 위한 목적이 분명하지만, 페스티벌을 사랑하게 만든 동인은 아니다. 콘서트와는 다른 활기 넘치는 매력이 뮤직 페스티벌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처음에 '내가 좋아하는 밴드 말고는 모르는 가수들도 있는데 재미있을까?'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때의 나에게 꿀밤을 한 대 먹이고 싶다. 처음 보는 가수가 나와도 야외무대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세션 소리와 노래를 들으면 숲 속에서 피톤치드를 흡수하듯이 청량한 에너지가 몸속에 채워지는 기분이 든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다. 그러다가 취향에 맞는 노래를 발견하고, 숨겨진 보석 같은 아티스트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페스티벌에는 항상 푸릇푸릇한 풀 위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서 듣거나 가까이에서 관중들과 가수의 열기를 느끼기 위해 스탠딩 존에 가서 들을 수 있다. 나는 항상 초반에 시원한 생맥주와 음식을 즐기기 위해 돗자리에 앉아 있다가 스탠딩 존에 가서 뜨거운 청춘을 즐기곤 한다. 평소에 사람 많은 곳에 가면 에너지를 빼앗기는 기분인데, 그 순간만큼은 에너지가 채워지니 신기할 따름이다.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친구에게 항상 페스티벌을 갔다 오면 얼마나 행복했는지 삐약 거렸는데 한 번은 친구가 말했다.


- 네가 그렇게 좋다고 말하니깐 궁금하다. 나도 다음에 같이 가볼래.

- 진짜? 나야 정말 좋지.

- 페스티벌이나 콘서트 한 번도 안 가봤는데 한 번 경험해보고 싶어.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풍경을 친구에게도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오자 마음이 설레었다. 첫 경험이라 좋은 추억으로 남았으면 좋겠는데 하는 마음이 제일 컸던 것 같다.


그렇게 페스티벌 당일 아침이 되었다. 조금이라도 앞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최대한 일찍 가는 게 좋지만 되려 친구가 부담될까 봐 여유롭게 가자고 말했더니


- 이왕 가는 거 일찍 가자!


라고 말해 내심 기분이 좋았다. 역시 내 마음을 너무나 잘 안다니깐.


우리의 부지런한 노력 덕분에 적당히 좋은 자리에 돗자리를 깔 수 있었다. 야외에서 생맥주를 들이키며 첫 가수 무대의 라이브를 안주로 삼을 수 있는 곳. 입장을 기다리느라 지쳤던 친구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띄워지는 게 보였다.

하지만 스탠딩 존에서 우리는 잠시 이별을 해야만 했다. 친구가 서 있다가 발바닥이 아파서 돗자리에 가 있겠다고 말했다. 내가 좋아하는 밴드 무대까지는 같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크기는 했지만, 지금 이 순간 각자 좋아하는 장소에서 음악을 즐겨야 한다고도 생각했기 때문에 미련 없이 친구를 보내줬다. 우리의 고난은 그 밴드 무대가 끝난 직후부터 시작됐다. 앵콜곡이 끝나자마자 비가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빗방울은 빗줄기가 되어 온몸을 적시기 시작했다. 스탠딩 존에서 급하게 탈출한 뒤 나는 퍼즐 조각을 찾듯이 친구가 있는 돗자리를 수많은 인파 속에서 겨우 찾아냈다. 돗자리에는 물이 고여 있었고 친구는 음식을 사수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우산으로  막고 있었다.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번쩍였고 친구의 눈빛도 같았다. 결국 우리는 뒤에 무대들을 남겨둔 채 이 공간에서 탈출하기로 결심했다. 그 뒷일은 모른다. 일단 빠져나가고 보는 것이다. 비를 피할 수 있는 공간까지 도달하자 서로 정신을 차렸다. 페스티벌을 처음 경험한 친구에게 최고의 하루를 보여주지 못한 것 같아 아쉬운 감정이 먼저 밀려들어 왔다. 내가 본 반짝이고 몽글몽글한 풍경을 친구도 보기를 바랐다. 무대를 보기 전까지 긴 대기의 힘듦이 씻겨 내려가기를 바랐다. 하지만 비로 인해서 친구의 에너지가 뺏긴 것 같았다.


- 난 너무 좋았어! 첫 무대부터 분위기도 좋고 힐링됐어. 정말이야.


그런 나의 시무룩한 얼굴을 눈치챈 친구. 진심이 묻어 나오는 게 느껴져 시무룩한 마음이 사라졌다. 정말 단순하다니깐.

둘 다 홍대입구 근처에 살기 때문에 홍대입구로 넘어가서 배를 채우기로 했다. 지하철 안에서 메뉴를 고심했다. 페스티벌에서 에너지를 얻었기 때문일까 크게 배고프지는 않았지만 심리적으로 오늘의 고생을 맛있는 음식으로 풀고 싶었다. 그렇게 우리는 홍대에 비닐 천막으로 둘러싸인 루프탑 맛집에 가기로 결정했다. 이미 내 몸은 비바람에 맡겨진 지 오래이다. 우산을 쓰고는 있었지만 스스로 꼬질꼬질해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분명 힘들고 짜증 날 법도 한데 이상하게 이 모든 상황이 한편으로는 즐거웠다. 이것이 낭만인가. 이것이 청춘인가. 두 단어는 항상 나에게 긍정적인 힘을 주는 것 같다. 빗줄기가 강해지고 바람이 몰아닥칠수록 웃음이 나왔다. 루프탑에 올라가서도 비닐 천막 사이로 빗방울이 새어 나와 자리를 옮기고, 비바람이 식당 안 음악 소리를 덮쳐 시끄러워도 우리는 실실 웃었다. 실성이라기보다는 이것 또한 추억이라는 낭만적인 웃음이랄까. 그렇게 밤이 되어갈 무렵 자리에서 일어나기로 하자 친구가 슬며시 카드를 꺼내며 말했다.


- 저녁은 내가 살게. 내가 계속 힘들다고 투덜거리도 했고 오늘 네가 고생 많이 했잖아.


사실 식당까지 걷는 중간중간 힘들다고 해서 아주 작은 짜증과 장난을 담아 친구한테 ‘너 은근 잘 징징거린다?’라고 말했었다. 어떻게 보면 그 순간 내 짜증을 가볍게 풀기 위해 한 말이었다. 다시 한번 서로의 마음에 공감하며 우리의 우정이 다져지는 순간이었다.


집으로 가는 길에도 비는 여전히 우리의 우산을 거세게 두드렸지만 비가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그리고 덕분에 잊지 못할 페스티벌 추억과 하루를 만들어주지 않았는가. 그렇게 생각하니 다시 실실 웃음이 나왔다.


아직 우리의 인생은 낭만으로 가득 차 있다. 힘들어도 슬퍼도 아직은 낭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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