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시작하는 마음
Day 0
2025년 10월 23일, 제주 - 김포 - 인천 - 애틀랜타
제주를 떠나는 아침의 풍경은 완벽하게 아름다웠고, 다시 한번 살아있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아무것도 예상할 수 없어서 조금은 경직된 몸과 마음이지만, 일상을 살아가던 곳에서는 찾을 수 없었던 무언가를 만나기 위해 다시 한번 길을 떠난다.
날씨가 정말 좋은 날이었다. 그동안의 불안과 우울은 모두 흐린 날씨 탓이었던 것만 같았다. 화창한 햇살과 새파란 하늘과 사랑스러운 구름과 그 아래 잔잔한 바다의 하모니가 매우 아름다운 아침, 하늘에서 바라본 김포의 모습도 문득 낯설게 아름다워서 외국인 관광객인 것처럼 여러 장의 사진을 찍었다. 세계여행을 하다 보면 당연하게 여겼던 대한민국의 많은 면들을 새롭게 발견하는 기쁨이 더해지기도 한다.
언제 어디서나 어설픈 루나씨는 대한항공을 예약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델타항공 운항이라서 잠시 실망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모로 편안한 비행이었다. 그동안 숱하게 경험한 저가항공에 비하면 천국! (케냐 나이로비에서 서울 올 때는 인도와 베트남을 거쳐서 왔다ㅎ) 비행기 출발이 지연되었지만 빠르게 날아가겠다고 안내하는 기장님의 너스레가 유쾌하다. 화보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한국 승무원들과 다르게 부스스한 머리 그대로 출근한 아시아계 승무원이 눈에 띈다. 안내 방송을 하는 승무원의 한국어가 서툴다. 보딩 과정에서 끊임없이 스몰토크를 나누는 승무원들의 자유로움이 어색하다.
여행 경험 충분히 많고 비행기도 수없이 타 봤지만 아메리카 대륙으로 가는 비행기는 처음이었다. 다들 수다스럽고 목소리가 커서 넷플릭스 시리즈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었다. 20명의 외국인들과 아프리카 트럭킹 투어를 하면서 영어가 능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한국 방문 3주 동안 다시 리셋된 느낌이 들었다. 외국어는 어쩌면 이토록 쉽게 사라져 버리는지. 중남미를 여행하는 동안에는 스페인어에 집중하겠지. 그러면 점점 더 0개 국어에 가까워지겠지ㅠ 나는 어째서 영어도 잊어버리는 와중에 무려 네 번째 언어를 습득하려 하는가!!! 물론 가장 즐기는 취미 중에 하나입니다만, 하하하. 영어도 안 되고 스페인어도 안 되는데 어떻게 사나, 쓸데없는 고민을 하며 비행이 시작되었다.
나는 지금 행복하다>< 기내식으로 나온 제육볶음을 먹으면서 헤드폰으로 음악을 듣고 있는데 몸과 마음이 둠칫둠칫 춤을 춘다. 역시 중남미는 한껏 기대되는 여행지였다. 진작에 이 쪽으로 움직일 걸 그랬나. 아니지, 고민하는 시기를 지나서 알맞은 타이밍에 만나게 되는 새로운 대륙이다.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 처음엔 퇴사 고민, 그다음에는 당연히 미래 고민, 그러다 여행 고민, 결국 연애 고민까지 흘러갔다가... 퇴사 242일 만에 잡티 하나 없이 말끔한 마음으로 다음 여행을 준비하고 있다. 아주 오랜만에 자극 없이 잔잔한 책을 읽었다. 반드시 필요한 1년의 시간이다. 아주 조금씩, 더 행복한 사람이 되고 있다.
많이 밀린 세계여행 가계부를 정리했다. 12시간의 비행을 견디기에 아주 적절한 작업이었다. 5월부터 9월까지 무려 4개월 간의 지출을 메모만 하고 돌아보지 않았다(!) 가계부를 정리한 후 가장 놀랐던 사실은 한국 방문 때 돈을 제일 많이 썼다는 점이다. 쿠팡과 네이버쇼핑과 다이소와 올리브영, 그리고 멈출 수 없는 외식까지 환장의 콜라보;; 계속 이렇게 쓰다가는 거지꼴을 못 면할 것이다! 남들이 보면 아주 부자라고 생각하겠다! 그저 집도 없고 차도 없고 직장도 없으면서 경제 개념이 박살 난 사람일 뿐입니다만;; 또는 내일이 없는 인생... 하하하. 일단 어찌저찌 돈이 남아 있으므로 여행은 이어진다. 올해는 투자도 꽤 성공적이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백수가 되어 여행을 시작한 지 8개월이 넘어가고 있었다. 이제 좀 긴축재정 해야지.. 정신 차려야 한다ㅎ
애틀랜타에 도착했다. 시간을 거슬러 왔다(!) 한국 밤 시간에 출발해서 12시간을 날아왔는데 미국도 아직 밤이었다. 비행기에서 경험한 미국인들의 스몰토크가 정말 대단했다. 틈만 나면 대학 어디 나왔냐는 얘기까지 들어가 버리는 중년의 남자 승무원이 인상적이었다. 델타항공에서 익숙한 듯 하지만 낯선 미국 문화를 느낄 수 있었다.
아프리카 트럭킹 이후 12시간 비행 정도는 견딜 만한 듯 했고 3-4시간 정도씩 끊어서 두 번 꿀잠을 자며 중간 자리가 비어 있어서 행복했다>< 간식은 자느라 패스했고, 기내식을 두 번 야무지게 먹어치웠다.
상쾌한 컨디션으로 공항에 내렸더니 패스포트 컨트롤만 1시간 30분 이상 걸린다. 곧바로 환승해야 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실시간으로 흙빛이 되는 걸 볼 수 있었고;; 각 나라별 통역이 제공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통역 어플은 허용되지 않는 것 같았다.
점점 더 어두워지는 한밤중의 애틀랜타 공항, 멕시코에 가는 비행기는 내일이라서 1박 스탑오버를 위해 호텔 셔틀에 올랐다. 깜깜한 밤인데도 영화에서 본 것만 같은 거리 풍경에 잠시 설렌다. 애틀랜타 공항 근처에는 스탑오버를 위한 호텔이 매우 많고 루나씨가 선택한 Sonesta는 전반적으로 나쁘지 않았다. 리셉션 직원 적당히 친절하고 방 크고 어메니티 충분하고 완벽한 히터와 근사한 소파까지 탁월한 환승호텔이었다.
지구 반대편에 도착한 밤, 잠이 오기를 기다리며 잡생각에 빠져든다. 이번 중남미여행의 목표는 무엇인가? 3-4월의 태국, 필리핀, 이집트 여행은 스쿠버다이빙이라는 테마가 있었다. 6-8월의 유럽 여행은 가까운 친구들 방문과 스페인어 어학연수 등의 목적이 있었다. 9월의 아프리카 여행에서는 무조건 야생동물을 많이 만나고 싶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무엇을 위해 낯선 대륙에 온 걸까? 다이빙? 하이킹? 휴식? 운동? 사람? 자연? 건축? 문화? 유적? 예술? 언어? 경험? 새로움? 음식? 쇼핑? 춤? 음악? 별 생각 없었다. 약간 자동화 기계처럼 일단 돈과 시간이 있으니까 여행을 지속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번 여행의 목표는 그저 살아있는 것. 죽지 않고 살아남는 것. 한국에 있든 미국에 있든 멕시코에 있든 사람의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일상에서 행복한 것들이 여행에서도 행복하고 일상에서 고민인 것들이 여행에서도 고민이기 마련이다. 그냥 쉬고 싶었고 일상에 치이는 장소보다 자유로운 공간을 꿈꿨을 뿐이다. 그래서 결론은? 특별히 바라는 건 없다.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 매일의 일상을 꾸준히 이어나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