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이후로 거의 5년 만인가.. 일본 동경으로 출장을 다녀왔습니다.
숙소 근처에 돈키호테 매장이 있길래 퇴근 후 10시 즈음 저녁 산책 겸 돈키호테를 찾아갔고 1층부터 7층까지 가타카나로 된 플로어 맵을 드문드문 읽어가며 맨 위층부터 찬찬히 둘러볼 생각이었습니다. 딱히 사고 싶었던 것도 없었고 그냥 과자 몇 개? 그리고 다들 사간다는 가루형 소화제 정도만 떠올랐네요.
참 재미있는 공간이었습니다. 난잡하게 어질러진 듯하면서도 무언가 체계가 잡혀있는 듯했고 요즘 웬만한 해외 물건들은 큐텐이나 아마존 통해 심지어 오프라인 매장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음에도 처음 보는 듯한 물건들도 굉장히 많이 보였습니다. 물론 가격적으로(환율은 덤) 매우 매력적이었었고요. 결국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물건들이 장바구니에서 여행용 캐리어까지 이어져 한국에 들어오게 되었지만요.
귀국 후 무엇 때문인지 돈키호테라는 매장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고 어떻게 일본을 찾는 외국인들의 주요 관광 코스 중 하나가 되었는지 그리고 이 회사의 태생과 성장 배경이 알고 싶어 졌습니다.
그나마 인터넷을 뒤져 발견할 수 있었던 정보는 창업자인 야스다 다카오가 마작에 빠져 살다가 도둑시장이라는 잡화 점포를 창업하였고 그것이 성공했다는 짤막한 줄글정도였고 그 야스다 다카오가 2015년 '돈키호테CEO'라는 책을 발간, 한국에는 2017년 '돈키호테CEO'라고 번역되어 출간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책을 주문하고 읽어 가면서 저는 돈키호테 회사 창업의 역사, 실패의 과정, 이를 극복한 사례들, 그리고 돈키호테가 추구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가치가 무엇인지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돈키호테를 직접 경험하고 또 책을 통해 회사를 이해하고 보니 돈키호테의 유저 경험은 다른 상점과는 시작점부터 완전히 다르구나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책에서 야스다 다카오는 돈키호테를 기존 프랜차이즈 매장의 안티테제(anti-thesis)라고 정의했었고 흔히들 생각하는 정형화된 UX의 틀과 전혀 다르게 움직이고 있다는 걸 볼 수 있었습니다.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한 뻔한 UX 이론들, 가령 '빠른 결정을 위해 선택지의 개수를 줄여야 한다는' 힉의 법칙(Hick's Law)이라던가, 카테고리별 구분과 정리, 시선 흐름을 위한 고려, 매장에서의 유저 동선 등 UX 업종에 있는 사람이라면 학을 뗄 정도로 최악(?)의 경험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바로 돈키호테였습니다.
그렇지만 좋지 않은(돈키호테가 의도한 것이겠죠) UX가 있더라도 유저가 돈키호테에서 얻을 수 있는 '탐색의 재미', '구매 가심비'는 이런 불편함을 충분히 넘어설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원하는 제품을 구매하지 못했다고 나왔다 하더라도 이용자는 충분히 좋은 경험 거리, 구경거리를 발견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직업적 특성일지 모르겠지만.. 게임 산업에서 좋은 UX를 고민하는 저로서는 이러한 돈키호테의 운영 방식에서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뻔한 UX 법칙들에 맞춰 편안한 게임, 쉬운 게임, 유저가 어떤 목적지까지 가는데 어떻게 쉽게 안내해 줄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것은 절대 게임에서 좋은 UX가 아닙니다. 게임은 기획적으로라도 어려움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하며, 반복 도전에 따른 성취의 보람을 느낄 수 있게 해주어야 합니다. (누구나 다크소울을 쉽게 클리어할 수 있다면 과연 매력적이었을까요?)
그래서 그런지 저는 게임 UX는 철저히 '기획의 의도를 검증하는 과정'이라고 정의합니다. 어려운 게임은 애초에 어려워야 하며, 쉬운 게임은 쉬움 안에서 게임 플레이의 목적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좋은 게임 UX는 코어 플레이 루프로 인도할 수 있도록, 게임에 충분히 정착할 수 있도록, 자연스러운 유저 간 만남을 인도해 주는 등의 역할로도 충분하다고 봅니다. (단순 UI의 개선만으로는 이루어낼 수 없는 부분이겠죠)
세상의 괴짜들 그리고 그들이 이끌었던 비즈니스 성공 신화들을 복기해 보면 늘 테제-안티테제-진테제라는 정반합의 원리를 따른 듯합니다. 돈키호테는 기존 프랜차이즈에 반하는 방식으로 매장을 재미공간으로 차별화하였고, 온라인 게임 산업은 재미의 본질을 유지한 채 개발 방식의 차이를 두고 패키징 게임 시장과 경쟁해 왔고요. 결국은 서비스의 핵심, 본질인 재미에 집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게 아닐까요?
UX 혼자만의 노력으로 서비스에 재미를 제공하는 건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인다고, 굳이 좌절하고 본인의 미래에 대하여 낙담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중요한 건 내가 하는 일의 본질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죠. 최종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UX라는 무기를 잘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의 글들은 코어 재미로 가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검증해야 할 지에 대한 주제가 될 듯하네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정리하면, 서비스나 상품의 재미는 사용자 경험 설계를 넘어서는 영역입니다. 학문적인 UX 가이드를 넘어 사용자에게 탐색의 재미나 구매 가심비를 제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UX는 기능적인 측면을 검증하는 역할을 하며 재미까지 가는 길목을 다듬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즉, UX는 기획의 의도를 검증하고 사용자가 게임 내에서 도전과 성취를 충분히 경험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어야 하는 거죠.
마지막으로, 우리는 세상에서 성공한 비즈니스들과 사례를 살펴보며 일의 본질을 발견할 수 있는 안목을 길러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UX를 통해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또 어떤 새로운 물건이 기다리고 있을지.. 다른 돈키호테 매장도 둘러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