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쌀한 바람이 살금살금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올 때면 낯선 감성에 젖어들고는 하는데요. 어찌 보면 설레는 것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울적해지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영 싫은 느낌은 또 아니에요. 괜스레 오래된 노래가사를 흥얼거리기도 하고, 떨어지는 낙엽을 한참 동안 바라보기도 하고, 노랗게 물든 하늘에서 눈을 떼지 못하기도 하면서도 말이죠. 이 맘 때쯤 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계절병이 온 것이죠. 낯설지만 붙들어 놓고 싶은 이상한 기분에 젖은 채 과거 어느 시점의 '나'로 시간 여행을 해 봅니다. 세상을 잘 알지 못하던 그때. 세상의 전부라 생각했던 어떤 사람이 떠나가던 그때. 변해버린 그 사람을 원망하며 변하지 못하는 내가 많이도 미웠던 그때로 말이죠. 어찌할 수 없이 변해야만 한다고 스스로를 안심시키고 나서야 꾸역꾸역 변화를 받아들이던 모습들이 바로 어제 일어난 일처럼 생생합니다.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 누군가에게는 쉬울 수 있겠지만 변화를 끔찍이도 거부했던 저로서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사는 동안에 마주한 변화의 순간들은 언제나 두려움의 쓰나미로 돌변해 나를 덮쳐버리고는 했으니까요. 발버둥 치며 간신히 숨을 쉴 수 있게 된 후에야 비로소 변해야겠다는 생각을 실천에 옮길 수 있었습니다. 변화는 항상 두려움이었고, 그것을 벗어나는 방식은 되풀이되었죠.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된 건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습니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사실 말이죠. 어제의 것과 오늘의 것은 같지 않습니다. 하다못해 내 몸의 세포조차도 매일 버려지고 생겨나는 과정이 반복되고 있거든요. 변하지 않는 것은 내 생각일 뿐이지요. 이러한 사실을 깨닫게 된 후로 오히려 변하지 않는 것이 부자연스러운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자연은 항상 변화하고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변화로 인하여 조화로워 지죠. 다양한 상황 속에서 변화가 원인이 되면 그 결과 또한 변화가 뒤따라야 자연스러워지는 겁니다. 그런데 이걸 어쩝니까. 변화를 마주하는 것은 곧 두려움을 마주하는 것과 같아져 버렸으니 말입니다.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라는 책에서는 생쥐 두 마리와 꼬마인간 두 명이 변화를 대하는 방식의 차이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생쥐들은 꼬마 인간들보다 하찮아 보이지만 변화를 대하는 자세만큼은 더 현명하더군요. 오히려 그들에게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은 항상 변화가 일어날 수 있음을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변화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었죠. 주변의 변화에 따라 스스로 변화하는 삶의 자세를 가지고 있었기에 꼬마 인간들보다 더욱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반면 꼬마 인간들로부터는 저의 모습을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변화 자체를 두려워하는 그들이 안쓰럽기도 했으나 인간이기에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모든 문제해결의 시작은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니까요. 우리가 인정해야만 변화를 대하는 방식을 바꿀 수 있습니다. 인간이기에 변화를 두려워한다면, 인간이기에 그것을 긍정적인 신호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 것이죠. 더 나은 삶을 위해 변화를 시작하는 일종의 알림으로 두려움을 이용하는 겁니다.
변화를 실행해 나가는 일. 물론 두려움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는 주변 어느 누구도 나를 지지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들도 인간이니까요. 하지만 내가 변화하기로 결정한 그때, 그것이 오히려 내 안의 두려움을 이겨내는 길임을 깨닫기만 하면 됩니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임을. 그리고 결국 그것이 나를 더 강하게 만들어 줄 것임을 말입니다. 오늘의 깨달음이 영원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