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컨퍼런스 대담 시간에 나왔던 베스트 질문 두 개를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책 먼저 쓰고 나중에 하려고 했는데, 그러면 까먹을 거 같아서 그냥 서둘러서 씁니다..아하하;;;
솔직히 고백하면 질문 수준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습니다. 강연을 100분짜리로 압축하다 보니기초적인 내용도 많이 빠트렸거든요. 그런데 학생이라 그런지 어른들하고 달리 분쟁과 전쟁을 바라보는 '관점'이 좀 더 유연하고 다양하더군요. 그래서 흥미롭고 유익한 질문들이 여러 개가 나왔고, 분량 관계로 딱 2개만 소개드립니다.
1. 유대 국가가 없었다면 유대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깊이 있는 질문을 한 몇몇 학생들한테는 '대학원 가셔야겠네'라고 말하곤 했는데, 이 질문은 그런 차원을 넘어서 이미 대학원에서 한창 연구 중인 석박사들이 던질 법한 수준입니다. 저 역시도 3년 차에야 떠올린 질문이고, 매우 중요한 개념이라 책에서 군데군데 녹여냈습니다.
다른 여러 글에서 설명드렸듯이, 1880년대에 시온주의가 시작되고 1917년에 영국이 지지 선언을 하기 이전까지 절대다수의 유대인들은 '유대 민족'이란 개념에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유대 공동체를 이끄는 종교 지도자 랍비들도 민족성을 부정했고요.
나폴레옹(Napoleon)이 유대인들을 프랑스 민족에 동화시키겠다는 목표를 밝혔을 때 유대 명사들(notables)은 이에 동의했고,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종교적인 영역으로 한정했다. 즉, 유대인은 유대교를 믿는 신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정의한 것이다. (260쪽)
민족주의의 전파가 늦었던 아랍 지역에서는 이런 경향이 더욱더 강했습니다. 특히, 19세기 중반에 오스만 제국이 평등권과 세속주의를 도입하면서 팔레스타인에서는 유대인도 무슬림과 기독교도와 하나의 공동체(즉, 아랍인)라는 인식이 형성되고 있었습니다.
종교의 다름은 사회적 불화의 원인이 되기보다는 문화의 지평을 넓히는 역할을 했다. 유대 명절인 유월절에 유대인들은 누룩 없이 구운 빵을 만들어 무슬림과 기독교도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고, 유월절이 끝나는 밤에는 무슬림과 기독교도들이 빵과 꿀 등을 답례로 선물했다. 또 다른 유대 명절인 부림절(Pulim)에는 무슬림과 기독교도들이 유대 전통 복식을 입고 같이 춤을 췄고, 유대 성인인 사무엘과 시므온(Simeon)을 기리는 축제에서는 함께 기우제를 지냈다. 이슬람 전통에서 모세가 안장되었다고 믿는 여리고 인근으로 무슬림들이 순례를 다녀오는 나비 무사(Nabi Musa, 예언자 모세) 축제에서는 유대인들이 귀성하는 무슬림을 위해 음악을 연주하고 깃발을 흔들며 환호했다. 아브라함이 천사와 만난 것을 기념하는 기독교 축제 이드 알발루타(‘Eidal-Balutah)에서도 유대인들은 함께 구경하며 즐겼다.(210-11쪽)
종교 간 교류는 명절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유대인들은 매주 금요일 일몰에서부터 토요일 일몰까지를 안식일(Sabbath)이라 부르며 이 시간 동안에는 어떠한 ‘노동’도 하지 않는 것을 중요한 교리로 삼는데, 이 ‘노동’에는 말을 하거나 청소하는 것처럼 일상에서 필수적인 행동까지도 포함한다. 그래서 안식일을 지키는 독실한 유대인을 위해 무슬림이나 기독교 이웃이 밤에 양초를 대신 켜 주고, 안식일이 끝나면 유대인들이 전통 스튜(hamin)를 끓여서 보답으로 나누어주었다. 야콥 엘라자(Ya’akov Elazar)의 회고에 따르면, 안식일 동안 마당을 깨끗하게 유지하기 위해 안식일에는 우물에서 물을 길어오지 말라는 부탁도 무슬림 여성들이 들어주었다고 한다.(211쪽)
(헤브론에서) 아랍인들은 그들의 명절에 유대인 이웃들을 초대하곤 했다. 여름에는 포도밭에서 함께 휴식을 취하면서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먹고 마시고 잤다. 반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아랍인들이 귀빈으로 참석하지 않는 유대 명절이란 없었다. ... 유대인 행상인들은 정말로 아랍인들처럼 마을의 모스크나 촌장(mukhtar)의 집에서 숙박했다. (아랍) 마을 사람들이 금요일에 막벨라 동굴[이브라힘 모스크]에 기도드리러 오면 유대인의 집에서 머물곤 했다. (213쪽)
앞서 소개한 여러 회상이 증명하듯, 개혁 이후에 아랍인과 유대인들이 더욱 친밀해진 것은 틀림없다. 심지어 일부 학자들은 이 시기의 유대인들을 “아랍 유대인”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아랍 유대인’이란 단순히 아랍 지역에서 사는 유대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아랍 정체성을 가진 유대인을 의미한다. 어떻게 유대인이 아랍 정체성을 가질 수 있냐는 의문이 들겠지만, 아랍 정체성은 인종적이거나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 언어를 핵심으로 한 여러 문화적 특징을 공유하는 문화적 정체성이다. (213쪽)
'아랍 유대인' 관념을 옹호하는 학자들은 유대 국가가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아랍 유대인들이 자연스럽게 아랍인으로 불리게 되었을 것으로 봅니다. 저 역시도 여러 기록을 찾아 읽다 보니 동의하게 되었고요.
오늘날 많은 학자들이 간과하고 있지만 이는 유럽 유대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럽에서는 세속주의가 두 세기 먼저 자리를 잡았고, 19세기 초나 중반에는 이미 유대인이 공동체의 일원으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었습니다. 다만, 19세기 중순~말부터 민족주의가 강해지고, 또 시온주의가 태동하면서 그에 대한 반향으로 유대인이 독자적인 민족 집단이라는 인식이 서서히 확산된 것이고요. 따라서 유대 국가가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유럽 유대인들 역시 그냥 영국인, 독일인, 프랑스인으로 불리게 되었을 거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유대 국가가 없었다면 유대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라는 질문이 훌륭한 이유는 분쟁을 정말로 올바르게 바라보는 시각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분쟁의 원인은 민족주의와 식민주의의 결합체인 시온주의 때문이라고 지적되는데, 그렇다면 시온주의가 없었다면 어떤 세상이 되었을까. 평화로웠을까?' 이는 분쟁의 원인이 정말로 시온주의가 맞는지에 대한 고민도 담겨 있고, 또 한편으로는 '원인'을 제거하면 바람직한 세상이 만들어질 수 있을지에 대한 관심도 엿보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분쟁의 결과적 측면(전쟁)에 초점을 맞추는 것과는 대비되는 훌륭한 접근법이지요.
2. 1972년 뮌헨 올림픽 팔레스타인 테러와 나치즘의 관계
지금으로부터 반세기 전인 1972년 9월 5일 새벽, 독일 뮌헨(Munich)에서 열린 하계 올림픽 기간에 테러가 발생했다. 팔레스타인해방운동 단체 중 하나인 ‘검은 9월단’ 소속의 대원 8명이 이스라엘 선수촌에 침입해 2명을 살해하고 9명을 인질로 잡은 것이다. 이들은 인질을 풀어주는 조건으로 이스라엘이 수감 중인 234명의 팔레스타인인의 석방을 요구했다. 이스라엘은 거부했고, 독일이 구출 작전에 나섰으나 실패했다. 인질은 전원 사망했다. 이후 이스라엘은 ‘보복’으로 레바논에 있는 팔레스타인 난민촌을 습격해 수백 명을 살해했다. (582쪽)
팔레스타인 저항운동을 나치즘과 연관 짓는 시각은 굉장히 오래되었습니다. 실제로, 1930년대부터 팔레스타인인들은 독일에 도움을 청하고, 2차 대전 때는 민족운동의 지도자인 아민 후세이니가 나치 편에 서서 반유대주의 선전대로 활동했습니다. 이번 전쟁 중에도 초기에 하마스 대원 시신에서 히틀러의 저서 한 권이 발견됐다고 뉴스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우리 방송에서도 전파를 탔습니다.
그러면 팔레스타인 테러는 나치와 연관이 있는 걸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오히려 과거에 팔레스타인인들은 독일과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시온주의자들에 앞서서 독일의 기독교도들이 팔레스타인에 먼저 식민촌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영국과는 사이가 좋은 편이었는데, 영국이 팔레스타인을 강제지배하고 시온주의를 돕자 반감이 커졌고, 1930년대부터 영국에 대항하기 위해 영국의 적과 손을 잡게 됩니다. 그게 바로 독일입니다.
나치즘은 특정 (민족, 인종) 집단의 우월성과 다른 집단의 배척을 핵으로 삼는 사상입니다. 즉, 팔레스타인 저항운동과는 완전히 무관한 개념입니다. 단지, 나치가 배척한 주요 집단이 유대인이었고, 팔레스타인인들의 적이 유대 국가인 이스라엘이라는 점을 이유로 친이스라엘계는 양자를 결부 지어서 매도하는 선전을 해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유대 집단의 우월성과 아랍인을 배척해 온시온주의가 나치즘과 닮아 있으며 이는 오래전부터 제기된 비판입니다.
(영국) 정부가 기다리던 우드헤드 위원회의 보고서는 10월에 완성되었다. 다행히도 필 위원회의 친시온주의적 성향은 계승되지 않았다. 한 위원은 심지어 유대인 기구의 간부들에게 “시온주의는 유대 민족을 부흥시키기 위한 현명한 운동이 될 수 없습니다. 시온주의는 우리가 히틀러에게 반대했던 것과 똑같은 민족주의입니다.”라고 직설적으로 비판했다. (621쪽)
그런데도 가자지구에서 히틀러 책 하나 발견했다고 나치즘 연류를 보도한 외신과, 이를 또 받아쓴 우리 자랑스러운 언론들.... 그리고 그걸 믿는 국민들은 대체.... 하아... 우리나라에도 히틀러 자서전은 수천, 수만 권이 있습니다...
이런 게 '왜 교육이 필요하고 우리가 학교에서, 대학에서 무엇을 배우는 게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실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 오해하실까봐 덧붙이자면, 이 질문을 던진 학생은 이번 행사를 기획한 친구 중 하나로, 몰라서 물은 게 아니라 다른 학생들한테 가르침을 주고 싶어서 고른 질문입니다.)
이외에도 몇 개 더 소개해드리고 싶은데.. 글이 길어져서 그냥 생략했습니다. 참고로 가장 많이 나온 질문 중 하나는 영국의 잘못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왜 국제사회는 영국의 만행을 방관하고 사죄를 요구하지 않는지 등등. 어차피 제 글을 보는 브런치 독자의 연령대가 높은 편이니 다들 뭐 아시리라 믿습니다.
끝으로, 소감 하나 말하자면 이번 강연을 하면서 솔직히 팔레스타인 문제에 이토록 관심이 큰 학생들이 많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아니, 12시부터 7시까지 하는 강연을 돈 내고 오다니... 직장인이라면 이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다들 아시죠? 뉴스에서 사람들 무참히 죽는 걸 보고 학생들도 이렇게 관심을 가지고 전쟁이 없는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데, 우리 어른들은 무얼 하고 있는지 반성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