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페일 블루 Nov 13. 2023

하루 알바(1)

오늘, 여기 오길 잘했다 싶은 생각과 겸사겸사의 미학.


아르바이트 다녀온 사진과 선물 받은 김부각.

최근에 일정이 없는 날은 그날그날 일일 아르바이트를 알아보고 다녀오고 있다. 당근 마켓을 이용하거나, 네이버 카페 중 문화상점을 이용하거나, 알바몬 사이트를 이용해서 구인하고 있는데. 거의 대부분 원하는 날에 일이 있는 건 신기한 일이다. 단 그 일을 내가 고를 수는 없겠지만. 낯선 환경에 부딪힌다는 건 나름의 각오가 필요하지만 의외로 각오를 다지는 법은 아무 생각을 하지 않고 우선 해본다이다. 물론 가서 이거 받고 내가 이런 일을 하다니. 나 지금 뭐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고작 하루뿐이니까 어떻게 보면 리스크가 크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되려 하루뿐이라면 열심히, 즐겁게 라는 자기 최면이 잘 통하기도 한다. 


이번에 알아본 알바는 문화상점 카페에서 올라온 플리마켓 판매 알바직이었는데. 근처이기도 했고, 글을 올린 지 얼마 안 됐을 때 조회수가 없는 상태라 바로 지원하기로 했다. 원목을 이용한 소품을 판매하는 곳이었는데 핸드폰 케이스와 에어팟 케이스 그리고 자잘한 소품들을 판매하고 있었다. 사장님과 통화를 한 통하고 시간이 지나 당일에 시간 맞춰 출근했다.


날이 무척 추웠는데, 왼쪽 가게에는 액세서리, 선인장, 목도리, 담요 등을 판매하고 계셨고 오른쪽 가게에는 가죽 공예로 만든 지갑 제품을 판매하고 있었다. 맨 끝에서 두 번째 자리에 세팅을 하고 첫 손님을 받으며 장사를 시작했는데. 즐겁게, 열심히 하자고 마음먹어서인지 날도 춥고 사람도 많이 없는데도 제법 열심히 한 수익을 낼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중간중간에 빈 가게의 손님들을 대신 눈치껏 봐주기도 하고. 구경하면서 모자도 하나 사고 핫팩도 얻고 플리마켓에 대한 정보도 듣고 손님들과도 열심히 얘기했더니 시간이 금방... 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바깥 날씨가 추워도 서로서로 도와가면서 좋은 경험을 한 것 같다.


특히 잠깐 오른쪽 가게의 사장님이랑 대화를 하며 많이 배웠는데. 잠깐 자리 비우신 사이에 오시는 손님 분들을 응대하는 것을 보고 말을 걸어주시면서 이것저것 챙겨주셨다. 사람이 마음의 문을 여는 순간은 사소한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 같다. 사장님은 여러 가지 경험을 쌓고 마지막에 가죽 공예를 시작한 이야기에 대해 들려주셨는데 번아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그리고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도 이렇게 하루씩 나와서 뭐라도 하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해 주셨다. 유쾌한 사장님이셨다. 술집도 해보시고, 네일숍도 해보시고, 해외도 나가보시고. 여러 가지 일을 해보신 만큼 다양한 경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셨는데. 특히 많은 일을 하면서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뭔지 모른 채 눈 감았다 떴을 때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 있었고 거기서 느끼는 번아웃에 대해 길게 이야기해 주셨다. 그러니 하고 싶은 일을 찾은 나는 정말 운이 좋은 거라고. 아직 아무것도 늦지 않았으니 열심히 하라고 해주셨다.


한참 얘기를 듣다가 조금 민망하지만 앞자리가 3으로 바뀌면서 이뤄놓은 것도 하나도 없고 부딪히고 깨지기만 해서 아무것도 한 게 없어서 힘들었다는 말을 했을 때 사장님께서 이런 말을 하셨다.


"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말은 겸사겸사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이야. 너무 열심히 살다가 한 순간 무너지면 그게 더 힘들어. 바닥에는 끝이 없어. 반지하가 끝인 줄 알았더니 창문이 없는 반지하로 내려갈 수도 있는 것처럼. 뭐가 됐든, 하는 김에 겸사겸사. 그래 한 번 천천히 끝까지 가보는 거야. "


겸사겸사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을 듣고 나서 하루 알바라는 경험도 글로 바꿔봐야겠다고 결심하는 순간이기도 했고. 아무튼 이렇게 첫 화를 쓰게 된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와 겸사겸사를 배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장님 가게에서 지갑을 하나 골라서 샀다. 언젠가 지갑은 참 귀한 거니까 좋은 곳에서 맞춰야지라고 생각했는데. 사장님의 지갑이 눈에 들어오기도 했고, 좋은 인연으로 만난 귀한 지갑이면 왠지 모르게 운이 따라줄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아르바이트를 왔던 내 손에는 모자 하나, 지갑 하나, 그리고 사장님이 많이 팔아준 손님을 붙잡아 주어서 고맙다고 간식으로 사주신 김부각 하나가 몽글몽글 들려있었다. 기분이 좋았다, 아주 많이. 날은 춥고 솔직히 내가 뭐 하는 건가 싶은 순간도 있기는 했는데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인데 어른이 된 후로 느껴보지 못한 막내로 귀여움을 잔뜩 받은 기분이라 기분이 좋았다. 어떤 하루는 말도 안 나오게 피곤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다정했다.


그리고 이날은 마감하는 날마저 끝까지 배웠는데 너무 열심히 할 필요는 없지만 남들이 책 잡히지 않게 마무리를 꼼꼼하게 하고 가는 게 좋다며 사실 사장님이야말로 조금 일찍 들어가셔도 괜찮았을 것 같은데. 내가 마감 시간을 다 채우고 마치는 것을 도와주시고 인사도 받아주고 가셨다. 어른은 시야가 넓은 것 같아,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지 걱정을 해줄 수 있는 사람에게 걱정을 받아보는 건 좋은 경험이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10분 늦게 간다고 큰일이 나는 건 아니라고. 겸사겸사 도와준 거라고 다음에 인연이 닿으면 또 보자고 하셨다. 인연이 닿으면 또 보자는 말은 단단한 질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못 보면 아쉽겠지만 안 봐도 잘 살 거 안다는 느낌의 말. 그런 생각을 하면서 집으로 오는 길. 기분이 너무 좋아서 실실 웃음이 났다. 감기는 확정이었지만, 이런 하루라면 또 겪어보고 싶을 만큼.



작가의 이전글 바텐더의 일기(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