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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나가는 계절이 아쉬운 이유

(700번째 발행글)

by The Happy Letter


11월이 되니 아직 늦가을이라고 해도 될지 아니면 이제 초겨울이다 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요 며칠 하루하루 점차 해도 짧아지고 아침 기온도 꽤 쌀쌀해져 감을 여실히 체감합니다. 개인적으로 필자도 스스로를 거의 인생의 ‘늦가을’ 무렵에 속한다고 봐서인지 요즘 들어 저물어가는 계절의 변화가 더더욱 예사롭지 않게 보입니다.


얼마 전에 어느 분이 살아생전에 명확히 해 두겠다며 ‘연명 치료’延命治療 거부 서약을 문서로 등록한다는 말을 듣고 나니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환자와 환자 가족에게는 경제적 부담이라는 문제를 넘어 윤리적 갈등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여기저기 안락사安樂死나 ‘조력사’assisted dying라는 말이 공공연히 거론되는 마당에 “웰다잉”이라는 관점의 논의가 낯설지만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예를 들어 낙태 허용과 금지 논쟁이 그러하듯 이런 사안의 해석과 그 적용의 잣대를 바라보는 관점은 -대개 늘 그렇듯이- 그것이 남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의 문제일 때는 사뭇 달라져 버리기도 합니다. 이런 사적인 해석과 잣대가 단지 인지상정人之常情으로만 볼 수 없는 이유는 그만큼 그 사회적 영향력도 크기 때문이겠지요.


오늘도 낙엽이 수북이 쌓인 산책길을 걸으며 ‘자연의 이치’를 보면 우리네 삶의 진리가 보인다는 말을 곱씹어봅니다. 이 늦가을도 지나가면 우리에게는 -필연적으로- ‘겨울’이 찾아오겠지요. 필자에게도 언젠가는 그런 서약서를 쓸 날이 오고야 말겠지요. 언젠가는 우리도 재가 되고 흙이 되고 또 바람이 되고 말겠지요.




이토록 쉬이 지나가는 계절이 아쉬운 이유는 저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필자의 경우 예전에 갖지 못한 것들에 대한 아쉬움이 많이 남는 것 같습니다. 어떤 물질적 소유所有보단 때묻지 않은 유년기에 한껏 몰두해 봤으면 좋았을 법한 시간들에 대한 회한悔恨때문입니다. 그랬다면 어쩌면 필자가 지금 좀 달라져 있을지도 모르겠지요.


지금껏 살아오면서 “먹고사는” 현실적인 문제로 필자도 어쩌면 가장 절실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채 살아왔는지도 모릅니다. 만약에 내 젊었던, 그 황금같이 빛나던 시절, 그 청소년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몇 날 며칠 밤을 새워가며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도, 신神이 과연 존재存在하는지 묻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을 텐데 지금은 굳어버린 몸도 머리도 따라 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매일 글을 쓰려고 애쓰며 삽니다. 이 가을이 다 가기 전에 ‘가을’이라는 키워드로 몇 편의 글을 남겨볼 요량으로 필자도 최근 짧은 산문散文이나 시詩형식으로 글을 발행했습니다.


이 글로 이제 여기 브런치에 700번째 글을 발행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어떻게 이렇게 많은 글들을 쓰고 또 발행할 수 있었느냐 물으신다면 바로 지금 이 글을 읽으시는 독자(작가)분들 덕분이라고 답하고 싶습니다. 독자(작가)분들께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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