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 머무는 자리

잘 써지는 곳? 없어요.

by 묘선생

인간에게도 고양이처럼 햇빛 자리 같은 곳이 하나쯤 필요하다.

그래서일까. 인간은 글을 쓰기 위해 자리를 찾아 헤맨다. 작업실, 카페, 독서실, 도서관, 빈 강의실, 창가 쪽 의자...
어떤 날은 조용한 방을 고집하다가도 어떤 날은 굳이 소란스러운 곳으로 나간다.

나는 우왕좌왕하는 집사의 모습을 볼 때면 도대체 글 한 편을 쓰는 데 왜 저렇게 장소가 많이 필요한 걸까 생각하곤 한다. 고양이라면 햇빛이 드는 자리 하나면 충분한데.

하지만 오래 지켜보니 알게 되었다. 인간은 마음이 머무는 자리에서 글이 잘 나온다. 몸을 어디에 두느냐가 문장의 결을 결정한다는 것을.


오늘 수업에서 집사는 칠판에 '작업실'이라고 쓰고 이렇게 물었다.
“여러분에게 글이 잘 써지는 자리는 어디인가요?”

그 질문 이후, 인간들의 깊은 고백이 하나씩 올라왔다.

머리가 굽슬굽슬한 중년 여성이 말했다.

“저는 식탁이요. 오랫동안 가족 밥상 차리던 자리인데… 어느 날, 그 자리에 제가 먼저 앉아봤어요.
남을 위해 움직이던 자리에서 나를 위해 멈춰보는 게 처음엔 어색했는데 그게 제게는 큰 변화였어요.”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조용히 앞발을 모았다. 식탁은 내가 창가 햇빛자리 다음으로 좋아하는 자리다. 그곳에는 음식과 따뜻한 물이 있으니까. 고롱고롱.
인간이 ‘자기 자리’를 되찾는 순간은 생각보다 평범한 곳에서 일어난다. 식탁은 이 인간에게 일상의 무게를 이겨내며 글로 넘어가는 첫 간이역이었다.

다른 수강생도 손을 들었다.
“저는 카페요. 집에서는 자꾸 누군가의 시간이 섞이잖아요. 카페는… 이상하게도 사람 많은데 오히려 혼자예요. 낯선 대화와 주문 벨 소리가 제 시간을 다시 만들어주는 느낌이에요.”

나는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고양이에게 군중은 피해야 할 대상이지만(정말이지 끔찍하다!) 인간에게는 ‘적당한 타인의 온도’가 오히려 마음을 조용하게 만들 때가 있는 것 같다.

카페에서 쓰는 문장은 타인의 삶 위에 잠시 기대어 만들어지는 문장인지도 모른다.

또 다른 누군가는 의외의 장소를 말했다.
“저는 버스 안에서 그렇게 잘 써져요."

사람들이 버스요? 하며 웃었다.

"네.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정류장이 있으니까 그게 한 마디가 죄는 것 같기도 하고. 다음 정류장까지 한 문장,
그다음 정류장까지 한 단락. 멈출 지점을 알면 쓰기가 덜 무서워요.”

나는 그 말이 오래 남았다. 고양이에게 목적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지만 인간에게는 ‘끝을 알고 시작하는 것’이 불안을 줄여주는 장치가 되는 모양이다.

흔들리는 자리에서 쓴 문장은 ‘흔들려도 결국 앞으로 간다’는 감각을 남기는 듯했다.

식탁은 자기 자리를 되찾는 용기였고, 카페는 적당한 타인의 온도에 기대는 공간이었고,
버스는 불안을 작은 단위로 나누는 기술이었다.
나는 그제야 알았다.
글이 잘 써지는 자리란 거창한 작업실이 아니라 자기 마음이 견딜 수 있는 자리를 그때그때 찾아가는 일이라는 것을.

고양이가 햇빛의 이동에 따라 자리를 옮기듯 인간도 마음의 그림자를 살피며 자리를 바꿔 앉는다.
그 한 번의 이동이 문장의 방향을 바꾸기도 한다.

그런 이야기를 나누던 집사는 글을 쓰는 사람들의 다양한 작업실을 들려주었다.

"버지니아 울프는 말했죠. 여자가 글을 쓰려면 경제력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즉, 아무에게도 침범당하지 않을 자유로운 공간이 필요한 거죠. 여기서 여자를 인간으로 바꾸어 읽어도 무방합니다.”

그리고 덧붙였다.

“앨리스 먼로라는 소설가는 아예 〈작업실〉이라는 단편을 쓰기도 했어요. 작업실이란 게 사소해 보여도
사람의 가장 은밀한 마음이 숨는 곳이거든요.”

“어떤 작가는요, 큰돈 들여 작업실을 얻어놓고 정작 그 앞 카페에서만 마감을 했대요.
작업실에 들어가면 글이 더 두려워졌다나…”

수강생들이 웃었고 나는 그 웃음 너머 공감의 마음들을 보았다.

작업실은 기능보다 심리의 공간이라는 것을 인간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집사는 남산 ‘하루에’에서 봉준호 감독이 작업했던 일화를 말하며 작품들이 태어나는 장소의 기묘함을 설명했다. 봉감독이라니! 수강생들은 부러운 눈으로 집사를 바라봤다. 곧 집사는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저는 한때 호텔 로비에서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수강생들이 와— 하고 탄성을 냈다.

집사는 웃으며 답했다.
“부자라서 그런 건 아니고요. 그 호텔은 커피가 무제한 리필이었어요.
슬리퍼 신고 있어도 아무도 신경 안 쓰고… 카페처럼 눈치도 안 보이더라고요.”

“작업은 잘 됐나요?”
누군가 묻자 집사는 피식 웃었다.
“그건… 다른 문제죠.”

나는 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편안함이 집중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고양이에게도 지나치게 포근한 자리는 잠은 잘 오지만 사냥은 안 된다.


마지막으로 누군가 물었다.
“선생님 등단작은 어디서 쓰셨어요?”

집사는 잠시 멈췄다가 말했다.
“지리산이요. 단편 열 편들고 신춘문예 철에 들어갔죠. 그때도 안 되면… 그냥 다 포기하려고.”

그리고 천천히 설명했다.
“펜션 비수기라 싸게 빌렸는데 난방이 안 돼서 전기장판 속에서 구워지는 장어처럼 지냈어요.”

나는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당시 집사의 절박함이 지금까지 남아있는 듯한 공기였다.

“그러고 보면 너무 편한 곳보다 조금 부족한 곳에서 글이 더 잘 써지는 것 같기도 해요.”
집사의 그 말은 조용했지만 단단했다.

나는 오늘 들은 이야기들을 머릿속에 하나씩 배치해 본다.
식탁은 ‘나를 되찾는 자리’,
카페는 ‘혼자와 타인의 온도가 교차하는 자리’,
버스는 ‘불안의 크기를 조절하는 자리’,
그리고 지리산의 펜션은 절박함이 잠을 밀어내고 문장을 밀어 넣던 자리였다.

그 모든 자리에 공통된 것은 하나다. 내가 오롯이 글을 쓰며 앉아 있을 수 있는 자리.
그게 작업실이다.
그게 글이 태어나는 곳이다.

고양이에게 햇빛 자리가 그렇듯,
인간에게도 마음이 내려앉는 자리 하나쯤은 필요하다.

오늘의 기록 끝.


내일은 또 다른 자리에서 다시 쓰면 된다.
그게 글쓰기이고, 그게 인간이고,
그게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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