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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레스트 Jun 08. 2024

수풀 속에서, 랄라-라

Episode 16. 노래자랑

노란 백열구 스탠드 아래로 큰 그림자가 사각사각 움직인다. 이부자리에 누운 한 사내가 옆 자리의 아이들이 잠에서 깨지 않도록 스탠드를 최대한 바닥으로 구부려놓고 뭔가를 쓰고 있다. 삼십 대 초반의 이 남자는 어디선가 빌려온 가곡집을 돌려주기 전에 맘에 드는 몇 곡의 악보를 음악공책에 옮겨적고 있는 중이었다. 현제명의 <니나>를 흥얼거리며 악보를 옮기는 그의 눈은 그림자 속에서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문간방 하나는 근처 공장에 다니는 이에게 세를 주었고 부엌 옆 창고 같은 방은 시골에서 올라온 조카가 빌려 쓰고 있다. 어쩔 수 없이 아이들과 한 방을 써야 하는 처지다. 직장에서의 위치도 결혼생활도 위태로운 젊은 가장을 그나마 버티게 해 주었던 것은 음악이었다. 힘겨운 하루를 마치고 돌아온 집,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가 두렵고 어린 자식들 얼굴에 그늘이 드리우는 게 싫었을 것이다... 우리 집 얘기다. 그래서였는지 당시에는 노래자랑이 자주 열렸다.


참가자는 셋. 수준급의 바리톤 실력을 갖춘 아버지와 맑고 고운 음색에 표현력마저 뛰어난 여동생 그리고 나. 당시의 기록은 사진과 녹음테이프로도 일부 남아있다. 이 녹음테이프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내 차례. 짧은 호흡과 불안한 저음으로 부르는 폴란드 민요 <아가씨들아>. 특히 후렴구 '트랄라. 라. 라-'는 잊을만하면 소환되어 나에게는 충격과 공포를, 나머지 가족들에게는 큰 웃음을 안겨주고 있다.


요즘 숲에서도 노래자랑이 한창이다. 늘 곁에 있는 텃새들 뿐 아니라 우리나라를 찾아 짝짓기를 하고 새끼를 낳아 기르고 다시 남쪽으로 돌아가야 하는 여름철새들 덕분에 그 수준이 한참 높아졌다. 특히 되지빠귀와 휘파람새가 내는 소리는 너무나 아름다워서 정말이지 '노래한다'라고 일컬을 만하다. 얼마 전 다녀온 남덕유산의 계곡은 이 친구들의 노랫소리로 가득 차 마치 거대한 성당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반면에 소란하거나 괴상하거나 음산한 소리를 내는 여름철새들 - 대표적으로 개개비와 파랑새, 호랑지빠귀 - 도 있다. 개개비는 물가 높은 나무 끝에 앉아서 찰지게 욕을 하듯이 마찰음을 쏟아낸다. 귓가에서 삐릿삐릿 지저귈 것 같은 파랑새는 사실 오리와 쥐를 섞은 듯한 - 궤궤궤궤 쮝쮝쮝쮝 - 소리를 내며 술 취한 듯이 휘적휘적 난다. 호랑지빠귀는 단 두 개의 음을 밤새도록 반복하는데 마치 흐느끼는 듯이 들려 등골이 오싹해진다.


숲이 푸르러 새를 눈으로 보기에는 쉽지 않지만 소리만은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로운 계절이다. 핸드폰과 이어폰은 잠시 넣어두고 시원한 숲 속에서 살아있는 노랫소리를 들어보시는 건 어떨는지. 가벼워진 마음으로 <아가씨들아>를 흥얼거리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산새들이 노래한다. 수풀 속에서. 랄라-라’.




우리나라를 찾는 파랑새의 영문이름은 Dollar Bird. 날개 끝의 흰 무늬가 1달러 주화 silver dollar coin를 닮아서 붙여졌다고 한다(실제로는 반원에 더 가깝다). 암수가 짝을 지어 다니니 둘이 합쳐 4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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