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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antino Jun 28. 2023

인천의 조봉암 옛집

             조봉암에게 생각의 용광로가 되어주었던 집

     조봉암(1898-1959)은 대한민국의 제헌 국회의원이자 초대 농림부 장관을 지냈던 사람이다.   그는 풍찬노숙했던 혁명가였고, 야망을 가졌던 정치가이기도 했다.   조봉암이 혁명가였기에 역모죄로 사형을 당했는지, 정치가였기에 정적에 의해 죽임을 당했는지는 아직도 베일에 싸여 있다.


     혁명가 조봉암은 1938년 신의주 형무소에서 7년형을 마치고 출옥한 후, 인천으로 내려와 살았다.   강화도에서 태어나 강화 농업학교를 마치고 강화군청에서 공무원으로 일했던 조봉암에게 인천은 익숙한 곳이었다.


     신의주 감옥문을 나선 빈털터리 조봉암에게 집을 내어준 이는 YMCA 중학부 동기였던 박남칠이었다.   박남칠은 당시 인천 미곡상 조합장이었고, 조합 사무장이었던 이승엽(후에 남로당 중앙정치위원)과도 친구 사이였다.   박남칠은 조봉암에게 인천 비강(쌀겨) 업 조합장 자리도 마련해 주었다.   당시 인천 비강업 조합 사무실은 현재의 동인천역 앞에 있었다.



인천에 있는 조봉암의 옛집 (2021년 현재) :  인천광역시 도원동


     직업을 얻은 조봉암은 박남칠 소유의 새 집으로 이사하여 세 들어 살았다.   인천 부청(시청)이 1940년에 지어 분양한 50채의 "부영(시영) 주택" 중 한 채이다.   이 중 세 채가 아직까지도 남아있는데, 세 집 중 가운데 있는 집이 그가 살던 집이다.   해방 직전 일제의 예비 검속에 붙들려 다시 서대문 형무소에 갇힐 때까지 이 집에서 살았다.  


     조봉암은 네 개 내지 다섯 개의 언어를 구사하지 않았나 싶다.   도쿄에서 주오대학을 다녔고, 모스크바에서 동방 노력자 공산대학을 수료했다.   서울 YMCA에서 영어 귀동냥은 했을 것이다.   1국 1당 주의에 의해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여 상하이당 서기까지 했으니, 적어도 4개의 언어를 쓰는 cosmopolitan 아니었나 싶다. 


     인천의 도원동 집에서 그는 머릿속으로 도쿄, 모스크바, 상하이, 서울, 신의주 땅을 종횡무진 떠돌아다녔을 것이다.   그의 메모지에는 지난 삶의 여정이 4개의 언어로 복기되어 있었을지 모른다.   박헌영의 1946년 8월 테제에 반기를 들게 되는 생각의 씨앗도 이 집에서 무르익었을지 모른다.


     1925년 당시 조선공산당의 창당 멤버였던 조봉암은 해방 후 결국 박헌영과 완전히 결별하고 미군정 주도의 좌우합작 운동에 참여하였다.   인천을 지역구로 하여 제헌 국회의원을 거친 후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서 농지개혁을 주도했다.   당시 농지개혁은 미 국무부의 패기만만한 케인지언 이상주의자들에 의해 기획되었는데, 이승만이 이를 수용했고, 인촌 김성수는 지주들을 설득하는 일을 전담하다시피 했다.   조봉암은 농지 개혁의 얼굴마담 역할과 실무를 맡았다.


     아직도 그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남아있다.   논란은 1956년 그가 진보당 후보로 나섰던 대통령 선거운동 과정에서 북한 간첩 양명산으로부터 돈을 받았는지 여부이다.   오래된 옛 소련 외교문서가 개봉되었다.   여기에 수록된 김일성의 조봉암에 대한 발언을 신뢰할 것인가의 문제가 논란의 핵심이다.   김일성의 말은 조봉암이 먼저 자금 지원을 요청했고, 양명산을 통해 조봉암에게 돈을 보냈다는 것이다.   정치인의 말을 100% 믿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더더구나 그의 발언이 1968년에 있었다는 점이다.   청와대 습격사건, 푸에블로호 사건, 울진삼척 무장공비사건, 통혁당 사건으로 남북대결 양상이 극에 달했던 바로 그 해가 1968년이었다.  남한에 대한 영향력을 과시하고, 남한의 내부 혼란을 부추겨야 하는 입장에 서있었던 그의 발언을 다 믿는 것은 과하다고 생각된다.


     이후 미국 국무부 기밀문서도 봉인 해제되었다.   미국 측이 조봉암의 구명을 위해 백방으로 뛰었던 것도 팩트로 드러났다.   이승만을 극도로 싫어했던 미국이 좌우합작운동의 시작부터 신익희의 사후까지 조봉암을 자투리 비선으로 남겨두었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북한과 미국의 남한에 대한 공작이 우심했던 그 당시는 이중간첩도 횡행하던 시대였으니, 1956년 진보당 사건 역시 쉽게 단언할 수 없는 미제 사건이라 하겠다.   소련과 미국의 비밀문서들이 드러났는데도 그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남아있다. 


     열린 대문 안을 기웃거리니 손녀를 안은 할머니가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신다.   집이 오래된 것 같은데 정갈하게 잘 관리하고 계신 것 같다고 하니, 마실 거라도 내어 오실 태세다.   급히 인사드리고 도망치듯이 계단을 내려와 골목에 서서 한참 동안 집을 올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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